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41> 잊혀졌던 사상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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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호 33면

1946년 11월 17일 국공회담이 파열된 뒤 장선푸(왼쪽 다섯째)와 뤄룽지(羅隆基·왼쪽 셋째), 장보쥔(章伯鈞·여섯째), 선쥔루(沈鈞儒·일곱째), 황옌페이(黃炎培·오른쪽 셋째) 등 민주동맹 지도자들이 옌안으로 돌아가는 저우언라이(왼쪽 첫째)와 동비우(董必武·오른쪽 넷째), 왕빙난(王炳南·첫째), 리웨이한(李維漢·왼쪽 넷째) 등 난징의 중공대표단을 송별하고 있다. 김명호 제공

유럽에 공산당 소조를 설립한 장선푸는 1923년 말 소련을 경유해 귀국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에서 군사 시찰단으로 와 있던 장제스와 안면을 텄다. 서로 호감을 느꼈는지 자주 어울렸다.리다자오의 소개로 광저우의 광둥대학 철학과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중 황포군관학교가 설립되자 정치부 부부장을 겸했다. 황포군관학교에 자리 잡은 최초의 공산당원이었다. 교장 장제스와 함께 생도들을 직접 선발했다. 이듬해 봄 저우언라이가 귀국하자 군관학교 당서기였던 랴오중카이(廖仲愷)와 정치부 주임 다이지타오(戴季陶)를 찾아가 저우를 추천했다. 워낙 진지하고 정중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거절할 엄두를 못 냈다. 저우언라이가 황포군관학교에 둥지를 틀고 정치무대에 정식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장선푸 덕분이었다.

'국민당 입당은 못한다' 공산당 탈당 택한 장선푸

1923년 1월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 국민당과의 합작을 지시했다. 공산당 내부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대다수의 당원들은 연합전선에는 찬성했지만 국민당 입당은 반대했다. 천두슈(陳獨秀)는 “이건 합작이 아니라 혼합”이라며 얼굴을 붉혔다. 쑨원(孫文)도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입당한다면 공개적인 국민당 비판이 불가능하다. 복종하지 않는 당원들을 제명해야 한다. 이게 무슨 놈의 합작이냐”며 코민테른 대표에게 짜증을 냈다.

1925년 1월 상하이에서 공산당 제4차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국민당 입당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장선푸는 “공산당의 기본원칙은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타 정당에 의지해도 된다는 말을 마르크스는 한 적이 없다. 코민테른의 요구는 마르크스주의에 위배된다. 레닌도 자산계급 정당과의 합작은 있을 수 없음을 누차 강조한 바 있다” 라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유럽 시절 장선푸에게 “저급한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조롱을 받은 적이 있던 차이허썬(蔡和森)이 “유치하고 가소로운 발상”이라며 장을 매도했다. 남에게 한 적은 허다했지만 들어본 적은 없는 말이었다. 미신의 출발이라며 인과응보를 믿지 않다 보니 분을 삭일 방법이 없었다. 탈당을 선언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1923년 베를린의 한 공원에 저우언라이(오른쪽 둘째), 류칭양(셋째), 자오광천(첫째)과 놀러 나온 장선푸(왼쪽 첫째)

저우언라이가 헐레벌떡 따라나갔다. 좁은 복도에서 장을 가로막았다. “나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제발 탈당은 하지 마라. 부탁이다.” 입술이 마르고 얼굴은 땀투성이였다. 장선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 조상들은 대대로 독서인이었다. 꺾일지언정 굽힐 수는 없다. 너는 상인 집안 출신이다. 굽히는 한이 있더라도 꺾이지는 마라. 사심 많은 자들일수록 공론을 들먹거리길 좋아한다.”

류칭양과 함께 베이징에 도착한 장선푸를 리다자오와 자오스옌이 맞이했다. 탈당을 만류했지만 장은 굽히지 않았다. 투항은 사랑을 의미했다. 상(尙)과 흑(黑)을 합친 것이 당(黨)이었다. “어둡고, 은밀하고, 사악하고 음흉한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떼거지로 몰려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공산당을 돕고 관계를 단절하지 않겠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코민테른은 국공합작 이후에도 중국공산당에 자신들의 정책을 집행할 것을 요구했다. 당원들이 국민당에서 탈당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중공은 출로가 막히고 확충이 불가능했다. 혁명은 어처구니없는 무지가 용납될 공간이 많았다. 코민테른의 결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제일 먼저 간파한 사람은 천두슈도 아니고 저우언라이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코민테른의 착오를 장선푸처럼 초기에 파악하지 못했다. 정면으로 맞설 용기도 없었다. 저우언라이가 코민테른의 착오를 명확히 안 것은 마오쩌둥을 지도자로 추대한 후였다.

살길이 막막한 장선푸를 칭화대학 철학과 주임이었던 펑유란(馮友蘭)이 다시 대학으로 끌어들였다. 10년간 책과 여자에 탐닉했다. 1935년 일본의 침략으로 화북 일대의 정세가 급박해지자 학생운동에 가담했다. 대학에서 쫓겨나자 다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저우언라이와도 다시 만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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