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 박라연 '왕오천축국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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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남장을 하고

세상을 한번 건너고 싶다

그때 그 병원에서 나를 잃었다고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줄 수 있다면

팔도강산 돼지우리에 세상 그리운 쓸쓸한 풀밭에

여장을 풀고

온갖 냄새를 맡아보고 싶다

왕오천축국전은 아니라도 돌아오는 내

머리카락이 다른 슬픔으로 흩날릴 수 있다면

내 시가 세상 건너는 자세를

흉내라도 낼 수 있다면

- 박라연(49) '왕오천축국전' 중

여자의 몸으로는 세상을 건너기가 어려운가. 박라연은 남장을 하고 세상을 건너고 싶어한다. 혜초는 사내라서 저 먼 실크로드를 걸어간 것일까. 중국 돈황의 '막고 220굴' 에서 페리오가 왕오천축국전을 훔쳐낸 것은 1908년. 나는 그로부터 87년 뒤에나 굴을 찾았다. 박라연은 그 책이 아닌 또다른 왕오천축국전을 꿈꾸는 것이지만. 내가 아닌 '내 시가 세상 건너는' 모래벌판의 비단길을 가면, 혜초같은 사내를 만날 것 같은 그 길을.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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