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해괴한 북의 '통항질서' 선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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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이 그제 인민군 해군사령부 이름으로 백령도 등 서해 5개 섬에 대한 '통항(通航)질서' 라는 것을 발표했다.

5개 섬이 북한 영해 내에 위치한 만큼 우리측 선박이나 비행기는 자기들이 정해준 폭 2마일의 좁은 통로 두 곳을 통해서만 섬을 오갈 수 있다는 요지다.

이런 조치도 서해상에서의 충돌을 막고 섬 주민들에게 생활상 편의를 주려는 '아량의 표시' 라고 북측은 강변했다.

북한의 주장은 지난해 6월 연평해전을 겪은 후 9월에 일방적으로 선포한 '해상군사분계선' 의 연장선상에서 한국과 미국을 겨냥해 협상카드를 축적하려는 다목적용으로 보인다.

발표문이 시종 '미군' 을 대상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달로 예정된 북.미 고위급회담을 의식한 인상이 짙다.

동시에 총선정국이 한창인 우리측을 압박하고, 북방한계선(NLL)문제를 국제화하겠다는 의도도 엿보인다.

여기에 서해 5도 해역에 꽃게잡이 철이 다가오면서 지난번 교전 실패에 대한 북의 보복전이 있을지 모른다는 걱정도 생긴다. 결국 북한은 비슷한 유(類)의 도발을 반복.감행함으로써 정전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변질시키고,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도모할 것으로 우리는 판단한다.

북한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서해바다에 긴장의 파고(波高)가 부쩍 높아진 것이 분명한 이상 우리 군 당국은 만반의 대비태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특히 현지 주민과 민간선박의 안전에 중점을 둘 것을 촉구한다.

우리쪽이 먼저 나서서 북한군을 자극할 필요는 없겠지만 만일 NLL을 침범당하는 경우에는 지난해처럼 단호히 대응해야 마땅하다.

1953년 설정된 NLL은 북한이 수십년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국제법상 '응고(凝固)의 원칙' 이나 '시효의 원칙' 이 적용되며, 따라서 실질적인 해상 군사분계선임이 분명하다.

북한이 정히 NLL을 문제삼고 싶다면 우리측에 남북기본합의서에 규정된 군사공동위를 열자고 제의하면 될 일이다. 화해.협력 기조와 탄탄한 국방태세는 대북정책의 양대 축(軸)이자 상호보완 관계이기도 한 만큼 정부와 군 당국은 확고한 자세로 대처하기 바란다.

우리는 한편으로 총선에 임하는 여야 정당이 북한의 이번 발표를 정략(政略)에 이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데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세 대북정책의 결과' 라든가, '야당이 이번 발표에 원인을 제공했다' 는 등의 말싸움은 선거에 눈먼 작태로서 적전(敵前)분열이나 다름없고, 서해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에 대한 모독이다.

국방에 관한 한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고, 더구나 선거바람을 타고 대책에 혼선이 가서는 안된다. 정치인들의 자중과 자제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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