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대통령’ 선출 … 영국, 외교대표 자리 받고 ‘블레어 카드’ 접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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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이사회 상임의장과 외교대표로 각각 선출된 헤르만 판 롬파위 벨기에 총리(왼쪽)와 캐서린 애슈턴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19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 참석, 환하게 웃고 있다. [브뤼셀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연합(EU)의 대통령 격인 유럽이사회 초대 상임의장을 뽑는 19일 오후(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이사회장 분위기는 여전히 ‘안갯속’이었다. 700여 명의 각국 기자들은 누가 상임의장에 뽑힐지 EU 집행위원회와 27개 회원국 정부 관계자들을 상대로 취재했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날 오후까지 공식 후보가 20명이나 난립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일 결론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했다.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오후 5시쯤 각국 정상들이 회담장으로 들어오면서였다. 정상들은 하나같이 “오늘 결론이 날 것”이라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했다. 그리고 정상회담이 시작된 뒤 회원국 정부 관계자들은 조심스럽게 “판 롬파위로 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정까지 갈 것이라던 회담은 두 시간 반 만에 싱겁게 끝났다.

이처럼 드라마틱한 반전은 영국의 입장 변화에 따른 것으로 전해졌다. 영국의 고든 브라운 총리는 당초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상임의장으로 밀었다. 그러나 프랑스·독일이 반대하면서 블레어가 선출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이 지지한 판 롬파위가 힘을 얻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브라운은 블레어 카드를 버리지 않고 각국을 접촉했다. 그렇게 며칠간 답보상태가 이어지자 각국 정상들이 저마다 한 명씩 추천하면서 후보가 난립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회담 직전 브라운에게 물러설 명분이 마련되면서 논의가 급진전됐다. 블레어를 포기하는 대신 외교대표 자리에 영국 출신의 캐서린 애슈턴을 앉히기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역할을 했다고 회원국 관계자들이 전했다. 애슈턴에 대한 신임이 두터운 조제 마누엘 바호주 EU 집행위원장과 영국 몫을 챙기려는 브라운 총리 사이를 오가면서 애슈턴 외교대표 안을 마련한 것이다. ‘애슈턴 카드’를 받은 영국이 프랑스·독일과 한목소리를 내자 판 롬파위 대세론이 형성되면서 손쉽게 만장일치를 이룰 수 있었다.

◆“EU 27국 통합이 우선”=EU가 판 롬파위를 선택한 것은 대외적인 대표성에 앞서 EU 내의 정치적 통합을 우선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EU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회원국 간 이견을 조율하고 통합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EU는 동과 서, 대국과 소국 등으로 갈라져 이해관계가 엇갈려왔다. 그 때문에 어떤 사안에도 쉽사리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EU의 고질적인 문제를 풀 수 있는 적임자가 벨기에의 민족갈등을 풀어낸 판 롬파위라는 데 이견이 없었다.

EU의 대외적인 영향력도 지금보다 한층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바호주 집행위원장은 “6개월 순회의장을 할 때는 주요 이슈를 놓고 미국·중국 등과 EU 차원의 통합된 의견을 교환하는 게 불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이슈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유럽이사회 상임의장의 역할에 대한 규정은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 때문에 ‘이름만 대통령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반대로 상임의장이 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전 순번제 의장의 경우도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할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경우 금융위기 당시 각국의 의견을 직접 나서 조율했고 그루지야 사태 등에도 적극 개입하면서 국제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뤼셀=전진배 특파원

◆알림=본지는 19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선출된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의 ‘President’를 ‘상임의장’으로 표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자리의 권한 등을 검토한 결과 통상적 의미의 대통령보다는 EU 회원국 정상회의를 이끄는 상임의장(permanent president)의 성격이 강하다고 판단한 까닭입니다. 외교통상부에서도 상임의장으로 쓰도록 권장했습니다. 다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EU 대통령격’이란 표현은 계속 사용하기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롬파위 초대 상임의장은 …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유력 후보군에 들지 못했던 헤르만 판 롬파위(62)가 유럽이사회 상임의장에 오른 건 그의 통합 능력 덕분이라는 게 현지의 공통된 분석이다. 판 롬파위는 올 1월 벨기에 총리에 취임했다. 당시 벨기에는 플라망드권과 프랑스어권으로 나뉘어 극단적인 분열을 겪고 있었다. 양측의 시위가 공권력을 무력화할 정도로 도를 넘었다.

도저히 답이 없을 것 같은 무정부 상황에서 그는 1년 만에 벨기에에 안정을 가져다 줬다. 유럽이사회장에서 만난 벨기에 기자들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니 “판 롬파위는 입보다 귀가 큰 정치인”이라고 설명했다. 남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포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다. 덕분에 국민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 벨기에 국민은 그의 상임의장 선출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가 총리직을 떠난 뒤 어렵게 찾아온 통합 분위기가 사라질까 걱정하고 있다.

외교대표 캐서린 애슈턴은 …

EU 외무장관격인 외교대표에 오른 캐서린 애슈턴(53)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지난달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가서명할 당시 EU 대표였다. 그는 피터 만델슨 전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브라운 내각에 차출되면서 EU 집행위에 뒤늦게 합류했다.

지난해 우리 FTA 대표단은 EU 측 협상 파트너가 갑자기 바뀌면서 논의가 늦어질까 걱정했다. 그러나 애슈턴 집행위원이 신속하게 각국 정부를 설득하는 등 적극적으로 뛰어 예정대로 지난달 가서명을 할 수 있었다.

그는 EU 집행위와 이사회에서도 가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19일 기자회견장에서 그는 바호주 EU 집행위원장과 서로 성이 아닌 이름을 부르며 친근함을 과시했다. 바호주 위원장이 지난주부터 “새 EU 팀에 여성이 포함되는 게 좋겠다”고 한 것도 그를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었다고 한다. 

브뤼셀=전진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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