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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노래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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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1905년 11월 18일 오전 2시쯤 외부대신 박재순과 하야시 일본공사는 광무황제(고종)의 윤허도 없이 탈취한 외부인(外部印)을 찍어 명칭도 없는 엉터리 조약을 ‘체결’했다. 게다가 체결 날짜마저 제멋대로 17일자로 했다. 순탄치 못했던 강제 체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강압과 강제를 동원해 체결된 것이기에 ‘늑약(勒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1910년 경술국치는 허울만 남은 나라를 잃은 것이고 실제로 국권을 상실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 때였다.

#1920년 5월 4일 당시 경성(서울)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는 일본의 여성 성악가 야나기 가네코(柳兼子)의 독창회가 열렸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음악공연이었을 뿐만 아니라 1919년 3·1운동의 좌절로 희망을 잃은 조선인들에게 위안과 꿈을 전하고자 열린 매우 의미 있고 특별한 음악회였다. 그래서 1300명이 정원인 음악회 장소에 1500여 명이 운집했다. 지난 18일의 낭독음악회는 90여 년 전 바로 그 뜻깊은 무대를 재현한 것이다.

#재현된 낭독음악회에서는 알토 가수였던 가네코를 대신해 메조소프라노 김신자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신수정 전 서울대 음대 학장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토마의 오페라 ‘미뇽’ 중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 등 10여 곡을 불렀다. 그리고 가네코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낸 작가 다고 기치로(多胡吉郞)가 가네코의 남편이자 문화적 협력자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글을 낭독했다.

#“저희는 조선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로 시작되는 야나기 부부의 ‘음악회 취의서’(1920년 4월)를 시작으로 “조선의 모든 이들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것은 끝없는 원한이다, 반항이다, 증오다”는 내용을 담은 무네요시의 ‘조선인을 생각함’(1919년 5월), 그리고 “조선은 지금 외롭게 고통받고 있다. …고통과 원한이 그 눈썹에 나타나 있다. …나는 바다를 넘어서 두터운 마음을 여러분께 보낸다”는 내용의 ‘조선의 벗에게 드리는 글’(1920년 4월)이 차례로 노래 사이사이에 낭독됐다.

#이날 낭독음악회에서는 28세에 요절한 천재 시인 남궁벽(南宮璧)이 ‘폐허(廢墟)’ 창간호(1920년 7월)에 실은 시도 소개됐다. “흙이여 기름져라/ 풀이여 싹나거라/ 폐허에// 꽃이여 피거라/ 열매여 맺거라/ 폐허에// 나비여 춤추거라/ 새여 웃음 짓거라/ 폐허에 와서// …그리하여/ 폐허가 변하여 화원이 되어라….” 남궁벽은 와세다대 유학 시절, 무네요시의 ‘조선인을 생각함’을 읽고 그와 친분을 쌓기 시작했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가네코의 활동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3·1운동의 좌절로 절망의 기운이 가득 퍼져 있을 때조차도 ‘예술에 의한 재생’을 믿었다.

#1968년 74세의 가네코는 다시 방한해 이화여대에서 음악회를 하고 ‘가라타치노하나(탱자나무꽃)’라는 일본 가곡을 불렀다. 그 노래가 지난 18일 재현된 낭독음악회의 앙코르 곡이 됐다. “탱자나무의 꽃이 피었습니다/ 하얗고 하얀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가사는 한국과 일본이 때묻지 않은 백지에서 다시 출발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모른다. 내년이면 을사늑약 105년, 경술국치 100년이다. 피와 분노로 얼룩진 지난 한 세기의 한·일 관계가 일순간에 새하얀 탱자나무꽃처럼 되긴 어렵겠지만 남궁벽이 시로써 토로했듯 나 역시 ‘예술에 의한 재생’을 믿는다. 그것이 르네상스 아닌가. 한·일 간의 새로운 문예 르네상스가 꽃피길 기대해 본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