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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욘사마 불단’까지 등장한 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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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그런데 이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정말 복잡한 감정에 휘말렸다. 이 책은 일본이 메이지(明治)유신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시대적 배경으로 담고 있다. 작가는 일제의 한국 침략도 불가피한 것이라며 정당화했다. 한국인을 한심하고 열등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이다. 근대화에 뒤진 한국을 서양문물로 무장된 일본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렇게 보이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시바는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만주와 조선을 일본의 영향력 아래에 둬야 하며, 이 외세로부터 일본을 지키는 자구책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일제의 침략을 이렇게 합리화한 시바의 역사관은 고스란히 일본의 대중적인 역사인식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 책은 일본인이 정체성을 강렬하게 자각하고 침략전쟁에서 패배한 데 대한 자괴감을 떨쳐내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한국은 형편없는 나라로 인식되면서 혐한론의 원류가 되기도 했다. 일본인 최고의 애독서가 한국의 이미지와 문화를 깎아내리는 역할에 앞장선 것이다.

이렇게 짓밟혔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인식은 요즘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변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민의 저력이 원동력이지만 결정적 계기는 역시 한류였다. 한류 바람은 시들지 않고 이제는 일본 사회의 문화 속에 녹아든 단계다. 욘사마는 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 환갑을 넘은 연배의 일본 여성들은 아침에 일어나 불단에 기도한 뒤 옆에 붙은 배용준 사진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오하요 고자이마스”라며 하루를 시작한 지 오래됐다고 한다. 이른바 ‘욘사마 불단’이다.

처음엔 남편들이 싫어했지만, 최근에는 옆에 있다가 덩달아 “오하요”라며 가벼운 인사를 덤으로 받게 되면서 부부관계도 좋아졌다는 얘기도 회자된다. 긴자 식당에서 만난 한 50대 여성은 “한류 팬을 둔 남편들은 아내들에게 엔도르핀이 돌기 때문에 대체로 부부관계가 원만하다”고도 전했다. 집 근처 60대 아주머니 와타나베는 일요일 밤 9시에 방영되는 ‘이산’은 박진감이 넘쳐 손에 땀을 쥐게 되지만 이어서 나오는 ‘천·지·인’을 볼 때는 졸다가 잠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시바가 아직 살아있으면 소설 내용을 고쳐야 할지도 모를 만큼 한국의 위상은 바뀌었다. 하지만 국회 폭력 등이 현지 언론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질 때마다 얼굴을 들기가 참 어려워진다. 국제사회에서 더 공정하게 대접받으려면 이런 걸 해결하는 것이 과제다. 욘사마 불단에만 우리의 국격 상승을 맡길 일이 아니다.

김동호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