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정 이사장 “한지 실로 만든 옷 세계인에 입힐 겁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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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의 스무 살 성년식을 준비하는 기분입니다.”

에스모드서울의 박윤정(78·사진) 이사장은 개교 20주년(19일)을 맞는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에스모드서울은 프랑스 패션학교인 에스모드파리와 분교 협정을 맺고 1989년 개교한 3년제 패션학교다. 한국에 유럽의 패션 분야 직업교육 시스템을 본격 도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업계에선 ‘대한민국 패션 사관학교’라는 별명으로도 부른다.

“개교 당시부터 우리 졸업생들이 앞으로 한국의 패션산업을 끌어갈 것이라고 자신했죠.” 박 이사장의 장담은 이미 현실이 됐다. 지난해 졸업작품 심사를 위해 한국 주요 패션 브랜드의 디자인실장급 100명을 초대했더니 그 중 18명이 에스모드서울 출신이었다. 최근 파리에서 ‘준지’라는 브랜드를 선보이며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는 디자이너 정욱준씨도 이 학교 2회 졸업생이다. “정욱준씨는 지금까지 가르쳐온 학생 중에 스타일화를 제일 잘 그리는 학생이었어요.”

경기여고를 졸업한 박 이사장은 약대에 진학하길 원하던 부모에게 난생 처음 반기를 들고 이화여대 의상학과에 입학했다. “예쁜 옷을 아주 좋아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모임에 입고 나갈 특별한 옷을 전날에 직접 만들었어요. 하룻밤 만에 만들기 어려운 옷도 있어서 결국 단추 구멍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냥 입고 나간 적도 있었죠.”

박 이사장은 대학 졸업 뒤 다른 디자이너의 의상실에서 10년간 ‘남의 집 살이’를 했다. 그런 다음 미국 유학을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슈트 전문 의상실인 ‘미스 박 테일러’를 열었다. 패션학교 설립을 계획한 것은 이 무렵이다. 여성복·남성복·디자인·패턴 가릴 것 없이 하나의 의상실에서 모든 작업을 도맡아 하는 한국 패션산업의 열악한 환경을 개선해보자는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스틸리즘(의상 디자인)과 모델리즘(패턴 디자인)을 필수 과목으로 하고 상급생이 되면 각자의 전공을 선택해서 좀더 전문화된 교육을 받도록 하고 싶었어요.” 미국과 유럽의 패션학교를 뒤져 찾아낸 곳이 에스모드파리였다.

“1회 입학생 150명 중 남학생이 15명뿐이었고 그나마도 모두 중도하차했는데, 올해는 남학생이 45명 입학했어요. 일찍부터 남성복 전문 과정을 개설한 덕분에 국내 남성복 시장을 우리 졸업생들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개교 20주년을 맞아 19일 서울 대치동 복합문화공간 크링에서 기념 패션쇼를 개최하고, 같은 장소에서 20~29일 ‘한지사 국제 패션 전시’를 연다. 전주 한지를 이용해 실을 만들고 실크·면 등과 혼방한 천으로 옷을 만들어 전시하는 자리다. ‘한지사(絲), 세계를 입다’ 주제의 이 전시에선 에스모드서울 졸업생과 재학생이 준비한 작품 45점, 국제 분교 학생들의 작품 26점이 소개된다. 전 세계 12개국 17개 에스모드 분교에 한지사 천을 보내 함께 만든 옷들이다.

“한지 옷은 기존에도 있었지만 주로 내의나 양말 또는 한복이었죠. 물에 빨 수도 있는 스포츠의류, 슈트, 이브닝드레스 등의 아웃웨어를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박 이사장에게 한지사 패션에 빠져든 사연을 물었다.

“패션산업은 서양복식을 주로 움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한국 고유의 전통미를 발굴, 응용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래서 한지를 선택했습니다. 해마다 열리는 에스모드의 전 세계 분교장 회의 때 ‘너희 나라만의 소재는 뭐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대답할 게 없었어요. 그런데 2년 전 전주시를 방문했다가 한지사를 만드는 쌍영방적을 알게 되면서 한국 고유의 친환경 소재를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쌍영방적의 김강훈 대표와 송하진 전주시장이 힘을 모아주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한지의 세계화를 해보려고 합니다.”

글=서정민 기자, 사진 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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