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중용의 정치를 위하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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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뜨겁고 길었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올 한 해를 되돌아 볼 여유를 가져보자. 지난해에서 넘어온 대통령 재신임 문제로 국민투표를 하느냐, 못 하느냐로 새해는 시작됐다. 뒤이어 3월, 야당에 의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전격 통과되면서 탄핵 정국 속에서 4월 총선이 치러졌고 집권당은 대망의 여대야소 정치구도를 창출했다. 대선자금 수사도 그 와중에서 진행됐다. 재신임-국민투표-탄핵 찬반으로 한 해의 절반을 국민은 갈등하고 패를 나눠 갑론을박했다.

*** 어려운 문제에 단순한 선택 강요

5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기각 결정을 내리면서 대통령은 63일간의 직무정지에서 풀려나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그때 모두가 기대했다. 이젠 좀 조용히 살겠지,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와 기업이, 국민 모두가 동참하는 시대로 접어들겠지 기대했다. 그러나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 발표되면서 잠복했던 천도 논쟁이 시작되고 곧 이어 과거사 논쟁, 이것도 모자라 국가보안법 개폐 문제까지 곁들여 나라는 가위 국민 전체가 과거사 정리를 위한 사지선다형 수능시험을 치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됐다. 수도 이전이냐 아니냐, 친일 규명이냐 반대냐, 보안법 폐지냐 개정이냐에 어느 쪽이 정답인지, 어느 쪽에 줄을 서야 할지 너무나 어려운 문제에 너무나 단순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셈이다.

정부가, 정치가 국민을 상대로 왜 이런 시험에 들기를 강요하는가. 갈등과 분열을 통한 세 결집을 바라지 않고서는 대통령이 앞장서 이런 시련을 강요하지 않으리라 본다. 논쟁을 통한 편 가르기가 아니고선 조용히, 합리적으로 해결할 문제들을 왜 이렇게 요란스럽게 국가적 어젠다로 대통령이 앞장서 주도하고 이것이 답이라고 결론까지 유도하는 정치모험을 감행하고 있는가.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선거공약-국회 통과를 내세워 막무가내로 추진할 일이 아니다. 정치권의 얕은 총선 전략이 낳은 야합의 결과물이란 걸 국민은 다 안다. 50만명 수용의 신행정수도가 수도권 과밀을 해소하고 국토균형발전을 담보할지 누가 장담할 수 있나. 국민적 합의 도출과 대안 모색을 해야할 장기적 국가과제다. 과거사 정리는 역사학자나 관계 전문가들이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자료 정리와 해석을 통해 차제에 완벽한 백서를 내면 된다. 다시는 불행한 과거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작업을 차분히 추진하면 될 일이다. 보안법은 남북 화해협력 시대에 반하는 여러 악용 소지가 존재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도 북의 신뢰도는 보안법을 완전 폐지하기엔 미흡하다. 완전 폐지와 결사반대의 맞대결로만 갈 것이 아니라 개정안과 대체법안을 비교해 절충점을 찾는 게 합리적이다.

시장경제 사회에서 성장과 분배는 대립적 요소가 아닌 상호 보완적 관계다. 남북문제에 있어 민족공조와 국제공조 또한 어느 한쪽의 일방통행으로 이뤄질 사안이 아니다.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른 선택이 아니라 공조와 보완관계다. 어느 한쪽이 정답이 아니라 둘 다 맞거나 단계적으로 해결할 일이다.

최악과 최선 사이의 다양한 가능성 속에서 상황에 알맞게 선택한 '가능한 최선'(best possible), 이것이 중용(中庸)이라고 고려대 최상용 교수는 그의 최근작 '중용의 정치'(나남출판)에서 역설하고 있다. 초월적 최선을 상정한 종교와 달리 가능한 최선을 추구하는 '정치적 중용'이 이 시대 난국을 헤쳐가는 지혜라고 보고 있다. 한반도 평화나 탈냉전의 방향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큰 이념적 틀 안에서 이념의 양극화를 배제하면서 보수의 자기 개혁과 진보의 탈급진화를 통해 국민통합.민족화해.국제협력의 길로 나아가는 게 바로 상생과 통합의 길이다.

*** '가능한 최선' 찾는 정치를 할 때

그러나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것만이 최선이라는 독선적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중용 사상의 핵심은 '군자시중(君子時中)'이다. 시기와 상황에 바탕을 둔 중용이다. 상황에 따른 조화다. 더구나 정치적 중용은 협상과 절충이다. 때로는 동태적 균형으로, 때로는 창조적 절충으로, 그리고 때로는 건설적 타협으로 국민을 편안하게 하면서 가능한 최선을 찾아가는, 그런 정치를 이제는 할 때가 됐다.

가을이 다가서고 있다.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차분하게 어제가 아닌 내일을, 갈등이 아닌 통합을, 후퇴가 아닌 전진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다시 생각할 때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