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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면자건’에서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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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침 타(唾), 낯 면(面), 스스로 자(自), 마를 건(乾). 즉 ‘타면자건(唾面自乾)’이다! 누군가가 내 얼굴에다 침을 뱉었을 때 이것을 곧장 닦아버리면 침 뱉은 사람의 분이 풀리긴커녕 더욱 화가 나서 싸움이 더 크게 번지기 쉬우니 차라리 상대가 뱉은 침이 저절로 마를 때까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중국 당(唐)나라 시절, 서슬퍼런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신하 중에 누사덕(婁師德)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런데 하루는 그의 아우가 대주자사(代州刺史)라는 자리에 임명돼 부임하려고 할 때 누사덕은 그를 불러 이렇게 당부하며 물었다. “너와 내가 황제의 총애를 받아 다같이 출세하니 주위의 시기와 음해가 있을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그런 시기와 시샘, 그리고 음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신하면 된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아우가 이렇게 답했다. “비록 남이 제 얼굴에 침을 뱉더라도 결코 기분 나빠하거나 화내지 않고 잠자코 닦아내겠습니다. 매사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응대해 결코 형님에게 걱정이나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우의 이런 대답을 듣고 누사덕은 반색하긴커녕 더욱 걱정어린 낯빛으로 타이르듯 말했다. “내가 염려하던 바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네게 침을 뱉는다면 그것은 네게 뭔가 단단히 화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네가 바로 그 자리에서 아무 말 없이 침을 닦아버린다면 그것이 되레 상대의 기분을 거스르게 되어 그는 틀림없이 더 크게 화를 내게 될 것이다. 사실 침 같은 것은 닦지 않아도 그냥 두면 자연히 마르게 되는 것이니, 그런 때는 침을 닦아낼 것이 아니라 그냥 마르도록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다.”

#언젠가, 언론인 조갑제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필생의 어록에서 뽑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는 말을 그대로 책 이름으로 해서 박정희 일대기를 펴내자, 진중권씨가 그 특유의 이죽거림을 담아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하고 응수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요즘 우리 사회는 온 천지가 서로 내뱉은 침 투성이다. 최근에도 이른바 ‘친일인명사전’을 둘러싼 공방전 속에 서로 내뱉은 침이 지천이다. 하지만 이제 정말이지 침은 그만 뱉자. 그리고 누군가 뱉은 침이 얼굴에 묻었거든 굳이 애써 닦아내지도 말자. 설사 흔적이 남을지라도 말이다. 누사덕의 ‘타면자건’ 고사에서처럼 그냥 마를 때까지 내버려두자. 그래야 이 지겨운 논란이 끝나지 않을까 싶다.

#내년이면 경술국치(庚戌國恥) 100년이다. 그뿐 아니라 1950년 한국전쟁 60주년이고, 60년 4·19 민주시민혁명 50주년이며, 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30주년이다. 뭔가 매듭짓고 한 차원 높게 승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해가 코앞이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서로 침 뱉기 바쁜 가운데 논란과 공방만 일삼으니 솔직히 부끄럽다 못해 절망감마저 든다. 한편으론 아직도 말끔히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가 부끄럽고 또 한편으론 그 과거에 발목 잡혀 미래로 나아가는 데 질척거리는 것이 안타깝다. 나라를 다시 찾은 지 65년이 돼 가건만 아직도 우리는 친일을 했다, 안 했다는 일차원적 논란만 계속하고 있다. 이젠 정말이지 한 차원 높은 미래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나.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