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산 히말라야 속으로…] 3.시들었던 영혼이 다시 '꿈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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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한동안 히말라야를 바라보며 지내다가 네팔의 동서부를 가로지르는 장정에 오른 지 5일째 되는 날이다.어둠 속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아침이 왔다.2차선 고속도로에는 흰 소들이 검은 눈을 껌벅이며 천천히 지나가고,원숭이들도 장난치며 짓까불다 쪼르르 달아난다.초가지붕과 황토벽 오두막집과 볏짚을 수북히 쌓아 둔 모습이 옛날 외갓집에 돌아온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작은 컵을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아침마다 빼놓을 수 없는 진풍경이다.네팔은 세상에서 가장 큰 화장실을 사용하는 나라다.모든 숲과 들판이 화장실이다.컵에 든 물은 휴지 대용이라고나 할까.이들은 왼손으로 뒷간 일을 처리하고,오른손으로 주식인 달바르를 주물러서 퍼먹는다.손가락이 있으니 수저가 따로 필요 없다.악수를 청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왼손을 내밀었다가는 눈총 받기 십상이다.

자전거 행렬을 피해 조심스럽게 운전하던 페마가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다.도로 위에 새끼오리들이 어미를 따라 아장아장 걷고 있다.새끼들은 엔진 소리에 겁을 집어먹은 듯 고갯짓을 하며 짧은 다리를 안타깝게 움직인다.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절로 웃음이 터진다. 여리고 순한 생명의 모습은 언제나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네팔에 오니 모든 것이 불편하고 생소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편하다.라이족은 한국사람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미국에 살 때는 생김새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은연중에 조심을 떨었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같은 몽골리안이라는 친밀감이 있다.여기서는 서양 사람들이 대신 조심을 떨어야 한다.인종에 대한 콤플렉스는 소외에 대한 열등감이 아니라 공간에 따라 주고 받는 선물인가보다.

네팔에서 길이 막혔다는 것은 길이 사라졌다는 뜻이다.우기에는 양동이로 쏟아붓듯이 내리는 빗줄기에 곧잘 발이 묶이곤 한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사라지는 길도 있다.며칠 전 황당한 일을 당했다.동네 사람들이 자동차 타이어로 길을 막아버려 앞으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경찰 한 명이 술을 먹고 행패 부리는 것을 마을 사람이 한 대 쥐어밖았는데,그 경찰이 두 트럭분의 동료를 실어와서 죄없는 사람들을 때리고 기물을 파괴했다고 한다.화가 난 마을사람들이 급기야 차도를 막아버린 것이다.마을 위원회가 구성되고 시의원과 SSP 특별경찰대장이 당도했다. 사고를 친 경찰이 불려오자 금방이라도 격돌할 태세였다.순한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움직이니 분위기가 더욱 살벌했다.

나의 일행은 선교사 두 분과 페마라는 이름의 현지인 운전수다.길거리 작은 식당 앞에 지프를 세우고 찌야를 마시는데 주위에서 쏘아보는 눈초리가 따가웠다.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너희는 뭐 하는 사람이냐고 꼬치꼬치 물었다.힌두교가 국교인 나라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선교사의 입장이 난처했다.

흥분한 군중이 외국인 차를 뒤집어 불태운 적이 있다는 미스터 박의 말에 간담이 오싹했다.페마는 좀 전에 지나쳐온 ‘덜게바이르’마을로 서둘러 차를 돌렸다.

우리는 무작정 기다리기 시작했다.우회도로는 없다.동서를 가로지르는 2차선 고속도로가 유일한 차도였다.끝없이 밀려든 승합버스와 승객들로 주위는 온통 축제분위기였고,차츰 되돌아가는 버스도 보였다.

일행인 미스터 오가 말했다.“언제 길이 열릴 지 아무도 모르죠.네팔에서는 하루에 한가지 일을 하기가 힘듭니다. 급한 사람은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리고,급하지 않은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오면 되지요.”이런 일에 짜증을 낸다면 굳이 네팔에 올 이유가 없다.기다림도 이곳 삶의 단면인 것이다.

언젠가 평론가 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바쁜 도시에서 살아야 삶에 탄력이 있는 게 아닙니까.”답답한 소리다.양식한 물고기와 먼바다를 떠돌던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이면 그 맛이 다르다.인간도 비슷한 속성이 있다.매일 부대끼며 사는 사람과 자연 속에서 넉넉하게 사는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는 그 색깔부터 다르다.탁 트인 하늘과 싱싱한 초목에 파묻히면 시들었던 영혼이 새롭게 빳빳해진다.

네팔 극서부 땅끝마을 마하깔리를 여행할 때는 현지인 오토바이에 매달려 드넓은 초원을 내달렸다.말을 타는 것처럼 울퉁거리는 비포장도로에서 마주친 녹색 벌판과 이리저리 날아오르는 새떼들,투명한 햇살 속에서 유채꽃이 번져가는 들판은 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상파가 태동한 프랑스 남부의 플로랑스 지방에 가면 들판이 온통 보라색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한번 꼭 가봐야지 생각했는데 비로소 들판이 보라색일 수도 있고 온통 노란 색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 어떤 스펙타클한 화면이 이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페마는 동서 분기점인 나라얀가드를 향해 곧장 지프를 몰았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생동하는 들녘을 바라보며 한가지 의문을 떠올렸다.괴테가 살아 있다면 또다시 이탈리아로 떠났을까?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1786년 37세의 생일을 앞두고 친구들 몰래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서양문명의 고향을 찾은 순례였으며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추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마차를 타고 로마에 가기 위해서 큰 결심을 할 필요가 없다.전화 한통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시간 날 때마다 갔다 올 수 있다. 더 많은 정보를 책과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접할 수도 있다.괴테가 살아 있다면 인간을 가상공간 속에 가두고 진을 빼는 문명의 홍수에 넌더리를 내며 잃어버린 원시성을 찾아 히말라야 자락으로 떠나지 않았을까.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기를 좋아하고,좋아하는 음식 음악을 좋아하는 장소에서 즐기기를 좋아한다.어쩌면 문명은 너무 많은 ‘좋음의 취미’를 공급함으로써 우리를 취향의 굴레 속에 가두었는 지 모른다.인공낙원으로부터 탈출은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준비하고 있다.개성을 강조하는 시대에 매일 시멘트벽에 갖혀서 아둥바둥 살아갈 필요가 있을까.때로는 좁은 집구석을 벗어나 초원으로 스며들라고 권유하고 싶다.풍요로운 녹색과 무한대의 우연으로 숙성된 자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글=김미진<소설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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