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세상보기] 질항아리를 찬양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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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토요일 아침이다.

어느 새 새해 들어 1주일이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동안 한 일이 무엇인가.

동백은 붉디 붉은 꽃을 다섯 송이나 피웠는데 너는 무엇을 하였는가…할 말이 없다.

이규보의 산문을 읽으니 더욱 내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질항아리를 찬양하는 글이다.

아, 그 여유.

"나에게 조그만 항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쇠를 두드리거나 녹여서 만든 것이 아니라 흙을 반죽하여 불에 구워 만든 것이다. 목은 잘록하고 배는 불룩하며 주둥이는 나팔처럼 벌어졌다…. 어찌 금으로 만든 그릇이라야만 보배로 여기랴. 비록 질그릇이라 할지라도 추하지 않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한손에 들기 알맞고 값도 매우 싸 구하기가 또한 쉽다.

그러니 깨진다 한들 뭐 그리 아까워할 것이 있겠는가.

술을 얼마쯤 담을 수 있는가 하면 한 말도 채 들지 않는데 가득 채워서 마시고 없으면 다시 붓는다.

진흙을 잘 구워 깨끗이 만든 까닭에 술맛이 변하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며 공기 또한 잘 통해서 목이 막히지 않는다.

그래서 부어넣기도 쉽고 따라 마시기도 편리하다.

잘 부어지는 까닭에 기우뚱거리거나 엎어지지도 않고, 채우기가 쉽기 때문에 항상 술이 가득 차 있다.

이제까지 항아리에 담은 양을 따진다면 몇 섬이나 될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마치 겸허한 군자처럼 떳떳한 덕성이 조금도 간사하지 않다.

재물에 눈이 먼 저 소인들은 두소(斗宵.작은 그릇을 말함)와 같이 좁은 재주와 기량으로써 끝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

쌓기만 하고 남에게 베풀 줄은 모르면서 오히려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자그마한 그릇은 쉽게 차서 금방 넘어진다. 나는 이 때문에 늘 이 항아리를 옆에 놓아두고 너무 많이 차서 넘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 타고난 분수에 맞추어 한 평생을 보낸다면 몸도 온전하고 복도 제대로 받을 것이다. "

나는 나에게 이규보 식으로 질문을 해 본다.

"너는 금으로 만든 그릇이 아니더라도 보배로 여기는가?"

"너의 가슴과 영혼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아서 한 손에 들기 알맞은가?"

"너의 가슴과 영혼은 깨끗한 까닭에 변하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며 공기 또한 잘 통해서 목이 막히는 법도 없는가?"

"너는 이 음습한 세상 얼음길 위에서 기우뚱거리거나 엎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늘 중심을 잘 잡아서?"

"잘 베푸는가? 아니면 늘 쌓고만 있는가, 아니 쌓으려 고민하고 있는가? 늘 부족하다고 아우성인가?"

"너는 분수에 맞게 살고 있는가?"

"차면 넘치는 법, 넘치면 넘어지는 법. 너의 그릇이 얼른 차서 넘치며, 넘쳐서는 넘어지는 것을 늘 경계하고 있는가?"

"너는 복만을 기다리는가? 그런 심정으로 어제도 복권을 샀는가?"

별로 자신있게 이규보에게 할 말이 없다.

고려 중기(1168~1241)를 살면서 이미 이규보는 가슴과 영혼이 살고 있는 현실의 일을 이만큼 직시하였는데, 우리는 컴퓨터를 두드리면서도 그런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이 인생살이에 정작 중요한 것, 그것이 무엇일까. 새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가슴과 영혼의 그릇, 쌓기만 하지 않는 가슴과 영혼의 그릇, 그것이 진정 이 시대의 복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토요일 아침이기 때문이다.

조금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일요일 아침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동백꽃을 바라본다.

동백꽃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에 중심을 잡고 있다.

아름답다.

아름답게 중심을 잡고 있다.

넘치지 않는다.

시든 잎은 떨어뜨려 버린다.

그러고 보니, 난도 그렇다.

시든 잎은 노오랗게 말려 죽인다.

그쪽으로는 물을 보내지 않는 모양이다.

어디 그뿐인가 40일을 추워야 그 꽃을 피운다니!

그러나 나는 시든 잎들도 부둥켜안고 있다.

갈아입을 줄을 모른다.

추우려고 하지 않는다.

꽃들도 알고 있는 그것을.

강은교 <시인.동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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