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조약 영국 총선 최대 변수 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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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바츨라프 클라우스 대통령이 3일 리스본 조약 비준안에 서명하면서 영국의 정가가 요동치고 있다. 집권 노동당은 환호했지만 보수당은 초상집이 됐다. 보수당은 내년 봄 총선에서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빼앗아 올 것이 현재로선 확실시된다. 정권 교체 굳히기에 들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리스본 조약 발효는 최대 악재로 떠오르고 있다.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인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이 내걸었던 리스본 조약 비준안의 국민투표 회부 약속 때문이다.

◇지지층 결집 카드가 최대 악재로=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물러나고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이 새 총리에 오른 뒤인 2007년. 연일 곤두박질하던 노동당이 리더를 바꾸고 난 뒤 재도약하는 모습을 보일 무렵이었다. 조기 총선을 주장하던 캐머런으로서는 브라운을 견제하면서 지지도를 확실하게 벌여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 때 빼든 카드가 국민투표였다. 그는 한 기자회견에서 “내가 총리가 되면 리스본 조약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말했다. 리스본조약을 향해 달려가던 주변국을 놀라게할만한 폭탄 선언이었다. 그가 국민투표를 제시한 이유는 유럽연합(EU)에 반대하는 상당수 보수주의자들을 확실한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의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캐머런의 결단은 보수당과 노동당의 지지율 격차를 다시 벌여놓는데 성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때 벌어진 지지율 격차는 2년간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캐머런의 결단은 2년만에 부메랑으로 되돌아와 그를 벼랑 끝에 몰아넣고 있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는 캐머런이 지난달 클라우스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소개했다. “리스본 조약에 서명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만간 분위기가 전환될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다급했던 것이다. 클라우스는 캐머런을 믿고 “내년 영국 총선까지 기다리겠다”고 말했다가 자국내는 물론 EU 회원국의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다.

27개 회원국의 비준 완료로 이제는 영국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어려워졌다. 당장 캐머런을 지지했던 EU 반대론자들이 “약속을 지키라”며 반발하고 있다. 그러자 캐머런은 4일 기자회견을 열었다. “영국의 헌법은 EU의 헌법보다 우선한다”며 강경파들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됐다. 캐머런은 그의 가장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돼 정치력에 치명타를 입었다. 지지층 이탈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브라운에는 마지막 역전 기회=지난달 여론조사에서 노동당(24%)은 보수당(40%)에 여전히 큰 차이로 뒤져 있었다. 보수당은 물론 자유민주당에도 쳐져 3당으로 전락했다. 그런 노동당은 EU 정치 통합 완성에 마지막 역전의 기회라며 반색하고 있다. 브라운은 지난해 금융위기 당시에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과 경제위기를 지휘하면서 지지율 급반등이라는 재미를 톡톡히 봤다. 자력으로 일어서기 어려운 처지인 그는 EU를 등에 업고 자국 내에서 인기를 만회하려는 것이다. 다른 회원국의 반대 속에서도 그가 토니 블레어 전 총리를 EU 초대 대통령으로 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블레어가 초대 대통령이 되면 EU 구성원이라는 의식이 없는 대다수 영국 국민들에게 소속감과 자부심을 동시에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권자 가운데 친 EU 세력의 확대는 보수당보다는 노동당쪽에 훨씬 유리하다는게 브라운의 판단이다.

파리=전진배<특파원allon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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