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87.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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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13장 희망캐기 22

난처한 것은, 의지할 집 한 칸도 없는 주제에 방극섭의 아래채에서 기약 없이 죽치고 있을 핑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 내외의 눈치에서 만의 하나 딴지를 걸거나 홀대하는 낌새를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승희의 처지로선 품앗이도 없는 처지에 눈칫밥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당장 초조하게 만드는 것은 무일푼이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한씨네 일행이 난전에서 벌어들인 돈은 모두 한철규의 수중에 있었고, 통장도 그가 관리하고 있었다.

그 돈을 배분받는 것도 여의치않다면, 주문진의 가게를 처분해서라도 일할 채비를 갖춰야 했다. 수복이 엄마로 불리는 방극섭의 아내가 첫눈이 내린 한겨울에 집을 나서는 것이 못마땅한 눈치였으나, 결혼 이후 남편의 고집을 꺾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눈시울을 곱지 않게 뜨고 고시랑거리면서도 채비는 소홀하지 않았다.

"당장 안면도로 달려가기보다는 눈 구경이나 하면서 쉬엄쉬엄 가보드라고. 우리 나라에서 눈구경이라면, 첫째로 강원도 지방을 꼽는디. 진부령 마산 기슭에 있다는 흘리마을이며, 인제군 기린면 점봉산 산자락 아래 진동마을이며, 태백에 있는 문수동 당골이며, 정선 고양산 아래에 있는 함바위 마을이며, 명태덕장이 있는 평창의 횡계리 같은 곳에 눈이 내리면, 집도 하얗고 산과 들도 하얗고 길도 하얗고…. 세상이 온통 눈 이불이며 눈 사막이랍디다. 그런 곳에 눈이 내리면 다래나무 줄기를 구부려 둥그렇게 만든 뼈대에 물푸레나무 가지로 얼기설기 엮어서 신발 위에 덧신는 설피라는 걸 신고 다녀야 눈밭에 빠지지 않는답디다. 눈이 폭폭 내리면 먹이를 찾던 노루가 집 안마당으로 껑충껑충 뛰어들기 예사고, 가마솥 뚜껑을 열고 물만 길어 두면 꿩이 수시로 가마솥 안으로 날아들어 뚜껑 닫고 삶아내기만 하면 된답디다. 그래서 거그서 사는 사람들은, 초겨울에 맞춤한 몽둥이 하나만 장만해 두면, 육고기 맛에 배를 두드려 가며 겨울을 난다데. 하긴 자주 내리지 않아서 그렇지, 쩌그 머신가, 전라도 진도도 눈 구경이라면 야그가 되는 곳이고, 무주에 있는 덕유산 죽천마을도 눈이 한번 내렸다 하면 워낙 청정지역이어서 겨울 내내 낙락장송에 나뭇가지마다 눈꽃이오. 동양화 한 폭이 따로 있겄소. 덕유산 자락은 삼수갑산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산골로 손꼽히지요. 산 좋고 물 좋다는 구천동이 무주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어라. 고흥이란 곳도 사람 살기에는 극락 다음 가라 해도 서러운 곳인디, 오줄나게 추운 겨울에도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딱 한 가지 흠이랑게. "

"지금 무주로 갈 건가요?" "싫다면 그만두겠어라. " "싫다고 해도 간단하게 단념할 것 같지가 않은데요?"

눈 구경이라는 것이 그녀를 안면도까지 유인하는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이상 따지고 들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주까지 가는 길은 수월치 않았다. 벌교로 나가 순천 그리고 구례를 지나고 남원까지 갔으나 무주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었다. 남원을 지날 때는 무싯날이었지만, 장터거리를 한 바퀴 휙 돌았다.

그러나 남원을 벗어나면, 장수는 코앞이었다. 장수에서 18번 국도를 타고 곧장 북으로 오르면, 진안읍내로 들어가지 않고 무주로 가는 국도와 맞물려 있었다.

장계라는 곳에서 9㎞ 정도를 달리면 계북이란 고장이 나서면서 덕유산의 겨울 기슭이 차창 밖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방극섭의 말대로 덕유산 등성이는 벌써 희끗희끗한 눈으로 덮여 있었다.

"죽천마을은 산 중턱에 앉아 있는 양지뜸이어서 눈이 내리면 들짐승들이 곧잘 내려온답디다. 토끼나 노루들이 양지녘 밭두렁으로 내려와 보리나 호밀싹을 뜯어먹기 좋아하기 때문이랑게. 그래서 죽천마을 사람들은 겨우 내내 보리밟기 겸사해서 토끼몰이로 깨가 쏟아지는 겨울을 보낸답디다. 승희씨도 그런 마실에 거처를 정하면 행복하지 않겄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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