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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침략의 선봉 이토 히로부미 심장 멈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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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통감 시절(1906~1909) 한복을 차려입은 이토 히로부미(뒷줄 가운데). 부인 이토 우메코(伊藤梅子앞줄 왼쪽 둘째)와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뒷줄 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30분 중국 하얼빈역 플랫폼에 총성 세 발이 울려 퍼졌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군사령관의 이름으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의 목숨을 거두었다.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심장. 69년간 잠시 쉴 틈도 없이 신일본 경영과 동양 평화를 위해 힘차게 고동쳐 온 위대한 심장은 이제 홀연히 이역의 첫눈 내리는 아침에 그 박동을 영원히 멈추었도다(‘백회통신(百回通信)’).” 사회주의 사상을 품고 있던 청년 문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조차 그날 쓴 추도문에서 ‘동양 평화’를 지키려 했던 위인으로 이토를 치켜세웠다. 언론들은 입을 모아 “이토 공의 죽음은 일본의 대손실만이 아니라 세계의 대손실”이라고 탄식했다.

“그의 죽음은 세계에 대손실은커녕 일본에 작은 손실도 주지 않았다. 비명의 죽음에 동정을 보내고 죽은 자를 애석해하는 것이 인정이니 우리들도 이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를 넘어 광적으로 애석해하는 것은 대반대다(‘오사카곳케이(大阪滑稽)! 신문’).” 이처럼 당시의 세태를 꼬집은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의 목소리는 귀 기울이기에 너무도 작았다. 한 해 뒤 일제는 이 땅을 식민지로 집어삼켰다. 이시카와는 감격에 겨워 이토의 죽음을 미화하는 단가 두 수를 지었다. “누가 총으로/나를 쏘았으면 좋겠다/이토 공처럼/진짜 대장부답게/죽어 보일 것이다.” “그러하오만/당신같이/장렬한 죽음을 /내 또래 청년들은/모두들 원한다오.” 그만이 아니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의 뇌리에 이토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아로새겨졌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요. 철도·광산·산림·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 (『안응칠역사』).”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밝힌 15가지 죄악상이 잘 말해주듯,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가슴속에 그는 침략의 원흉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1963년에서 84년까지 통용된 천 엔권 지폐의 초상 인물이었던 그는 오늘도 일본인의 기억 속에 근대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이었던 그가 이웃에 얼마나 큰 씻지 못할 아픔을 주었는지도 성찰하는 역사 교육이 일본에서 펼쳐질 때다. 그래야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충돌하는 한·일 국민들의 역사 기억이 화해하기 위한 징검다리의 첫 번째 디딤돌이 놓일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