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 시절(1906~1909) 한복을 차려입은 이토 히로부미(뒷줄 가운데). 부인 이토 우메코(伊藤梅子앞줄 왼쪽 둘째)와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인 이지용(뒷줄 오른쪽)의 모습도 보인다.
“그의 죽음은 세계에 대손실은커녕 일본에 작은 손실도 주지 않았다. 비명의 죽음에 동정을 보내고 죽은 자를 애석해하는 것이 인정이니 우리들도 이를 비난하지는 않지만, 그 정도를 넘어 광적으로 애석해하는 것은 대반대다(‘오사카곳케이(大阪滑稽)! 신문’).” 이처럼 당시의 세태를 꼬집은 미야타케 가이코쓰(宮武外骨)의 목소리는 귀 기울이기에 너무도 작았다. 한 해 뒤 일제는 이 땅을 식민지로 집어삼켰다. 이시카와는 감격에 겨워 이토의 죽음을 미화하는 단가 두 수를 지었다. “누가 총으로/나를 쏘았으면 좋겠다/이토 공처럼/진짜 대장부답게/죽어 보일 것이다.” “그러하오만/당신같이/장렬한 죽음을 /내 또래 청년들은/모두들 원한다오.” 그만이 아니었다. 그때 일본 사람들의 뇌리에 이토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영웅으로 아로새겨졌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요.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요.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요.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정치를 한 죄요. 철도·광산·산림·농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요 … (『안응칠역사』).” 안중근이 옥중에서 쓴 자서전에서 밝힌 15가지 죄악상이 잘 말해주듯,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의 가슴속에 그는 침략의 원흉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1963년에서 84년까지 통용된 천 엔권 지폐의 초상 인물이었던 그는 오늘도 일본인의 기억 속에 근대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제국주의 침략의 선봉이었던 그가 이웃에 얼마나 큰 씻지 못할 아픔을 주었는지도 성찰하는 역사 교육이 일본에서 펼쳐질 때다. 그래야 마주 보고 달리는 기차처럼 충돌하는 한·일 국민들의 역사 기억이 화해하기 위한 징검다리의 첫 번째 디딤돌이 놓일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