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병욱칼럼] 부패 껴안고 21세기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국제투명성기구(TI.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한 한국의 부패지수는 3.8로 조사대상 99개국 중 50위였다. TI가 매년 집계하는 부패지수는 부패가 전혀 없는 상태가 10점, 부패가 만연한 상태가 0점이다.

점수가 높을수록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로 평가된다. 문제는 한국 공직자들의 부패지수가 96년 5.02, 97년 4.29, 98년 4.2, 99년 3.8로 매년 악화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기업들은 올해 처음 조사된 뇌물공여지수에서도 세계 주요 19개 수출국 가운데 지수 3.4, 18위로 중국에 이어 가장 뇌물을 많이 쓴 것으로 나타났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주변에서 부패가 일상화돼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떡값' 으로 표현되는 정치인 및 고위 공직자와 기업간의 돈거래, 이번 인천 호프집 화재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 일선공직자와 업소간의 뇌물유착, 대출비리, 학교의 촌지, 문건사건에서 드러난 일부 언론인과 취재원간의 돈거래… 등등. 사회의 어느 한 구석도 성한 곳이 없다시피하다.

물론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심적이고 심각한 것은 정치인을 포함한 공직사회의 부패일 것이다. 심각한 공직사회의 부패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과 캠페인은 과거에도 여러 이름으로, 여러 차례 있었다.

70년 박정희(朴正熙)정부에서는 서정쇄신과 숙정, 80년 신군부에서는 정화, 김영삼(金泳三)정부에선 사정과 개혁이란 이름으로 부패추방노력이 주기적으로 거듭됐다.

그러한 노력은 없었던 것보다는 나았겠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부패추방노력이 조직화.제도화.국민의식화되지 못하고 다분히 과시적이고 용두사미(龍頭蛇尾)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제 부패는 단순히 국내에서 국민의 도덕성과 정치.경제.사회의 공정성 및 효율성을 저해하는 요인만이 아니다.

지난 2월 15일 '해외 뇌물방지협약' 이 발효되면서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가 살아남느냐가 걸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됐다. 부패비용이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차원을 넘어 부패하다는 것 그 자체가 국제거래에서 불이익을 받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아시아의 '네마리 용(龍)' 중 우리나라를 제외한 대만.싱가포르.홍콩은 부패추방에 비교적 성과를 거뒀다. 이 세 나라는 모두 강력한 부패추방기구가 관련법령의 뒷받침을 받아 과감한 부패추방 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대만은 5권분립체제의 하나로 감찰원이 있고, 싱가포르는 1960년 제정된 부패방지기본법에 따라 총리 직속의 부패행위조사국을 두고 있고, 홍콩은 1974년 독립된 부패추방기구인 염정공서(廉政公署)를 창설했다.

대만의 감란시기탐오치죄조례(戡亂時期貪汚治罪條例)는 부패행위에 대해 사형.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중벌주의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뇌물수수 혐의자의 영장 없는 체포 및 금융계좌 추적, 재취업금지, 공직자 부정축재재산 및 형성경위 불명재산 몰수, 3개월분 봉급 이상의 빚을 진 공무원에 대한 징계 등 과도하다 할 정도의 엄격한 조사.처벌을 하고 있다.

특히 홍콩은 조사.처벌과 함께 부패예방과 교육.홍보를 3대 과제로 실행해 왔다. 이 중에서도 교육.홍보가 매우 중시된다. 국민의 의식과 태도의 변화 없이는 부정부패 추방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다.

교육.홍보를 통한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통해 고발정신이 살아나고 규제혁파 등 부패예방을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마련이 국민 속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비교적 성공적인 외국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부패추방을 위한 몇가지 제도적 장치를 추출할 수 있다.

첫째, 독립적이고 강력한 부패추방기구다. 둘째, 부패의 온상이 되는 행정규제의 최소화다. 셋째, 내부고발을 포함한 고발자의 보호 및 인센티브제 마련이다. 넷째, 행정 특히 민원행정절차의 투명성이다. 다섯째, 홍콩의 경우처럼 법정에서 공직자가 금전 및 재산획득에 대해 만족스런 설명을 하지 못하면 유죄로 인정되는 등의 법제도다.

정부의 부패방지 종합대책은 제도적 접근이란 면에서 진일보한 것이다. 또한 국제투명성기구의 관심을 끈 서울시의 인터넷을 통한 '민원처리 온라인 공개시스템' 도 민원행정절차의 투명성이란 차원에서 주목할만한 시도다.

그늘 속에서 자라는 부패의 속성에 비춰 행정과정의 공개는 부패를 예방하는 효과적 방법일 수 있다. 다만 정부가 부패추방기구로 내놓은 '반부패특위' 가 싱가포르의 부패행위조사국이나 홍콩의 염정공서 같은 성과를 거두긴 어려울 것이다.

부패는 이제 우리의 사활이 걸린 문제다. 이런 부패를 껴안고 21세기에 선진국으로 나아가겠다는 건 허황된 꿈이다. 정부.정치권뿐 아니라 국민적인 반성과 문제의식이 시급하다.

성병욱 상임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