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따스함이 없는 정책은 실패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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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미국과 벌이는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MBC-TV PD수첩은 미국산 소의 광우병 위험을 보도했다. 선정적이었다. 이 프로를 본 한 여고생이 어느 대중가수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몹(mob)을 제의했다. 청계천변에 여고생들이 교복을 입고 모여들었다. 이 장난기 어린 집회는 마치 토네이도처럼 엄청난 바람을 일으키며 정국을 강타했다.

운동권이 치밀한 모의 과정을 거쳐 조직적으로 벌이는 종전의 시위와는 차원이 다른, 여린 여고생들의 소규모 집회가 거대한 정치집회로 진화한 원인은 무엇일까. MBC PD수첩의 악의나 여고생들의 철부지 같은 행동 탓으로만 돌릴 일이 아니다. FTA 체결로 얻을 총량적인 이익에 집착해 FTA가 초래할 부작용이나 손실을 치지도외한 정부 여당의 과오도 그 하나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는 초일류 기술이 아니면 세계시장에서 곧 경쟁력을 잃고 마는 냉혹한 시대다. 기술 수준을 끌어올려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고임금 상태가 지속된다면 연구개발 투자는 위축되고 그 결과로 우리 경제가 한계에 부닥칠 개연성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시장이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의견에는 많은 사람이 공감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를 쉽게 해고하게 하면 그 노동자 가족은 바로 그 순간에 생존권 자체가 위협받는 막다른 처지에 놓인다. 사회안전망이 미비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를 쉽게 자르는 제도를 노동자들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이런 속을 모를 리가 없으련만 정부 여당 사람들은 노동의 유연성을 강조할 뿐 약자에 대해 어떤 배려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도시는 상시적으로 재개발해야 한다. 불량건물은 헐고 새 건물을 지어야 한다. 재개발할 때 주변 환경을 정화하고 다양한 문화공간이나 휴식공간을 만든다면 보기도 좋으려니와 주민의 삶의 질도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낡은 건물에 세 들어 살며 생계를 꾸리고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에게 재개발은 일종의 쓰나미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설혹 보상을 받는다 하더라도 더 변두리로 밀려나야 한다. 그렇게 밀려나면 밀려날수록 그 사람들이 중심부로 돌아올 날은 멀어진다. 그런 이치를 아는 사람끼리 단체를 만들고, 그 단체가 개발 훼방꾼이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정부 여당 사람들은 개발이 창출할 경제효과는 주목하되 개발로 인해 더 주변부로 밀려나는 사람들의 어려움은 외면한다.

최근 들어 정부 여당은 미디어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과학기술이 매체 간의 장벽을 허문 지 오래여서 신문사가 방송을 겸영하지 못하게 한 법제는 손을 볼 필요가 있다는 데 공감하는 이가 많다. 신문사가 새로 방송을 겸영하면 일자리도 다소 늘어날 것이다. 인력 과잉으로 구조조정이 절실한 기존 방송사가 자연스럽게 인력 규모를 줄여 구조조정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방 겸영을 허용할 때 일어날 부작용은 결코 만만치 않다. 신규 매체가 등장할 때 광고시장이 자연스레 확장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케이블방송을 새로 시작할 때도, 위성방송을 시작할 때도, 전통매체에 투입하는 광고예산이 분산됐을 뿐이지 광고시장의 총량 자체가 눈에 띄게 커지지는 않았다. 신문사의 방송 겸영이 같은 결과를 낼 경우 신규 종합편성 채널과 보도전문 채널이 자립기반을 마련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빈사 지경에 놓인 지방방송이나 케이블방송, 위성방송 등 마이너방송은 더 어려운 처지로 내몰릴 것이 자명하다. 지방신문의 장래야 말하기조차 민망하다. 그러나 정부 여당은 신방 겸영의 밝은 면을 과장할 뿐, 새로운 정책이 야기할 부작용을 최소화할 대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여러 나라와 FTA를 맺어 수출을 늘려야 한다. 노동시장을 더 유연하게 해야 우리 기업은 경쟁력을 배양할 수 있다. 낡고 보기 흉한 동네는 늘 재개발해야 한다. 기술이 이미 매체 간의 벽을 허문 시대에 신문의 방송 겸영을 법으로 원천봉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부 여당은 강자에게 길을 내주기 위해서도, 약자를 위한 길을 닦아놓아야 한다. 새로 방송사업을 할 언론사가 연착륙할 수 있는 지원책을 모색하면서, 동시에 마이너 언론사가 살 길도 강구해줘야 한다. 그래야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고, 선(先) 개발 후(後) 배분의 선순환도 가능해진다. 그런 따스함이 없는 정책은 종국에는 찬바람을 맞을 것이다.

김민환 고려대 교수·언론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