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은혜와 원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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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6.25전쟁 반세기만에 그 원한의 후유증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충북 영동 노근리사건을 필두로 경남 마산 곡안리.창녕.사천.의령.함안.전북 익산.충북 단양 등에서 대부분이 노약자나 부녀자인 양민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수많은 목격자가 있는 엄연한 사실이 50년이나 금기사항으로 남아 있다가 가해 당사자인 미국의 언론에 의해 이제야 만천하에 알려지게 된 사실에 만감이 교차된다. 피해자들이 침묵했던 이유는 증언자들의 발언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마산의 한 증인은 "통비(通匪)분자로 매도당할지 몰라 숨죽이고 살아왔다" 고 했다. 이는 우리 사회의 국시였던 반공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됐는지를 증언한 것이다.

"우리 나라를 도와주러 온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점 때문에 주민들이 드러내놓고 말을 못했다" 고 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이 '우리 나라를 도와주러 온 미군' 이라는 말이다. 은혜를 입은 대상에 대한 배려라는 국민의식이 또 하나의 이유다.

이러한 국민의식은 임진왜란 후 명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재조지은(再造之恩.조선을 재건한 은혜)' 이라는 조선후기 사회의 의리론(義理論)을 연상시킨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왜란은 당시의 세계대전이었다. 명나라는 이때 구원군을 파견해 조선을 도왔다.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조선과의 밀접한 안보관계에서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는 공리적 해석도 가능하지만 안보차원을 넘어서는 전통적인 맹방의식 때문이었다는 편이 옳다.

만주에 저지선을 설정해 방어에 주력하면 되는데 굳이 조선의 전쟁에 개입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비인간적이고 막대한 비용이 드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겼고, 조선정부는 전쟁비용을 은으로 징발하려는 명나라의 요구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병자호란 후 명.청이 교체되자 현실적인 군사대국인 청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명을 재건의 은인이라 생각해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국민의식이 고조됐다.

그 결과는 향화인(向化人.명나라 귀화인)에 대한 우대와 명나라가 주도하던 평화공존적인 국제질서 체제 수호에 공이 있던 사람들을 현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조선이 유교문화의 정통계승자라는 인식에서 명나라의 후계자임을 확인하는 장치도 만들었다.

이러한 명에 대한 의리론은 평화공존의 국제질서를 파괴하면서 청나라가 일으킨 병자호란의 치욕을 잊지 말고 청을 쳐 복수설치(復讐雪恥)해야겠다는 북벌론(北伐論)과 표리를 이루면서 조선후기사회의 국가 대의가 됐다.

은혜와 원한의 이중주였던 것이다. 미국은 현대판 '재조지은' 을 잊지 않고 침묵하고 있던 한국인의 의식이 깨어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미국은 하루빨리 사건의 진상을 밝혀 사과하고 응분의 보상을 함으로써 한국인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 묻어두면 더 곪는 것이 상처다.

바람직한 동반자관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도 결자해지(結者解之)가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한국 정부의 진지한 의식전환도 요구된다.

소중한 젊은 시절의 한때를 한국전쟁에 바치고 이제는 늙어 가는 각국의 참전용사들의 모임에 관심을 보여야 한다.

감사패의 전달은 물론이고 한국에 초청해 그들이 목숨바쳐 싸운 한국이 전후의 잿더미를 딛고 이뤄낸 발전상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는 방법도 있다.

나아가 그들의 복지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야 할 것이다. 조선후기사회가 양란(兩亂 : 왜란과 호란)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자아정체성을 회복해 문화국가로 거듭나는 데 1세기가 걸렸다.

일제와 6.25전쟁 후유증 극복은 결코 늦은 것이 아니다. 일본과의 문제는 임진왜란과 일제의 강점이라는 원한의 과거사가 겹쳐 쉽게 해결되기 어렵겠지만 미국과의 매듭은 양국 당사자들의 의지 여하에 따라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다.

소련이 주도하던 동구권이 몰락함으로써 명실공히 세계의 주도국이 된 미국은 대국으로서의 금도(襟度)를 보여야 한다.

정옥자 <서울대 국사학과교수.규장각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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