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가 좋아” 노인 위한 의사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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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절에만 가면 마음의 평화를 느꼈던 소년은 고등학교 때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양로원과 고아원에 봉사활동를 하러 다녔다.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일이야말로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뜻을 실천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어 너무나 행복했다”는 그는 평생 그들과 함께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대학 진로를 정해야 하는 순간, 그는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설명했다. 당시 병원을 운영하던 삼촌이 “의사야말로 평생 너의 꿈을 실천할 수 있는 직업”이라는 조언을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봉사활동을 할 때, 아픈데도 치료 한번 제대로 못 받고 방치된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곧바로 그는 의사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의대에 진학했다. 이후 지금까지 그는 청소년 시절 품었던 생각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산다. 경희대 의대 재활의학과 김희상 교수가 주인공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봉사활동하고 노인학 배워

의대 졸업 후 그는 낙후 지역인 경북 안동시 녹전동에 공중보건의 근무를 자청했다. “전화 한번 하려면 면사무소에 가 교환원에게 부탁해야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낙후지역일수록 의사가 할 일이 많아요. 부임하자마자 동네 이장들을 초청해 ‘각 이(里)에서 의사 진료가 꼭 필요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금방 11명의 환자를 추천받았는데 모두 몸이 아파도 보건소 방문조차 하기 힘든 노인분이었어요” 그때부터 3년간 그는 매주 그들을 방문해 쌀·라면·우유·비타민·링거 수액 등을 전달했고 필요한 치료도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재활의학이야말로 노인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공중보건의 생활을 마친 뒤 경희대병원에서 재활의학을 전공한 그는 특히 노인 재활 치료에 관심을 뒀다. 연수도 미국 UCLA에서 노인학을 배웠다.

“재활의학을 전공하다 보면 치료는 의사와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까지 합심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돼요.”

전공의 시절, 50대 중반 남성이 호흡 중추가 있는 연수(延髓)의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돼 입원했다. 입원 직후부터 환자의 아내와 두 딸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의사에게 배운 재활 치료법을 온종일 환자에게 적용했다. 김 교수 역시 한 달 이상 병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보호자와 함께 환자를 돌봤다. 입원 45일 째 환자는 기적처럼 의식이 돌아왔고, 몸도 자기 관리는 스스로 할 정도로 회복됐다. “퇴원할 때 불편하지만 스스로 걸어 나가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환자를 보면서 의사가 된 보람을 만끽했지요.”

물론 치료를 해도 상태가 나빠지는 안타까운 환자도 적지 않다. 특히 점점 근육이 위축돼 끝내 숨을 못 쉬게 되면서 사망하는 근육 위축병 환자는 오랜 세월 환자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관절운동을 시키면서 휠체어를 조절해 주는 식의 치료를 하기 때문에 사망할 때마다 가슴에 묻게 된다.

근골격계 재활치료 전문가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김 교수는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중증 뇌성마비 환자가 있는 경기도 광주의 ‘한사랑 마을’ 방문은 1992년부터 2007년까지 계속했다. 2년 전 왕진 치료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은사가 정년 퇴임 후 그곳 환자를 정기적으로 돌보면서다.

근골격계 재활 치료 전문가인 김 교수는 요즘 들어 부쩍 젊은 층 환자의 방문이 증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신문에 젊을 때부터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15분씩 생활화하라는 말을 꼭 써 주세요. 작업 중엔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컴퓨터는 모니터를 눈과 50㎝ 떨어진 곳에 놓고 의자는 컴퓨터 상단이 눈과 수평이 되게 높이를 조정해야 합니다. 자판을 사용할 땐 어깨가 공중에 매달리지 않도록 팔꿈치를 기댈 수 있는 팔걸이 의자가 필요하지요”

절에서 느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김희상 교수. “죽는 날 까지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얼굴엔 인터뷰 내내 자비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박형무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학생 때도, 교수 돼서도 한결 같이 봉사의 길”

“소외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가 된 사람은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막상 현업에 종사하다 보면 바쁜 일상에 치여 의료 봉사는 어린 시절 품었던 막연한 꿈으로 가슴 한편에 접어 두지요. 그런데 김희상 교수는 달라요. 학생 때는 물론 공중보건의 생활을 하면서도 늘 봉사하는 의사의 길을 걸었어요. 교수 발령 직후 음성 꽃동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고, 2년 뒤엔 심한 뇌성마비 환자가 모여 있는 ‘한사랑 마을’ 진료도 다녔어요. 2003년 이후엔 다른 병원 의사들과 연대해 서울역 노숙자 무료 진료도 주도하고 있습니다. 한순간도 의료 봉사를 잊지 않고 실천하는 의사라면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들에겐 또 얼마나 정성 어린 진료를 하겠어요?” 김희상 교수에 대한 박형무(중앙대 의대 산부인과·사진) 교수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김 교수와 진료과도 다르고 근무지도 다르다. 서로 만날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한번은 우연히 학회에서 김 교수와 대면할 기회가 생겨 봉사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물어 봤다.

그랬더니 김 교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소외계층 환자의 얼굴에서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심을 느낄 수 있어요. 내게 의사로서의 보람과 마음의 평화를 주는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동력이죠”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의사가 진짜 명의 아닌가요?” 박 교수는 명의 추천 사유를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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