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부터 봉사활동하고 노인학 배워
의대 졸업 후 그는 낙후 지역인 경북 안동시 녹전동에 공중보건의 근무를 자청했다. “전화 한번 하려면 면사무소에 가 교환원에게 부탁해야 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낙후지역일수록 의사가 할 일이 많아요. 부임하자마자 동네 이장들을 초청해 ‘각 이(里)에서 의사 진료가 꼭 필요한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금방 11명의 환자를 추천받았는데 모두 몸이 아파도 보건소 방문조차 하기 힘든 노인분이었어요” 그때부터 3년간 그는 매주 그들을 방문해 쌀·라면·우유·비타민·링거 수액 등을 전달했고 필요한 치료도 했다. 이 경험을 통해 재활의학이야말로 노인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됐다.
“재활의학을 전공하다 보면 치료는 의사와 환자뿐 아니라 보호자까지 합심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돼요.”
전공의 시절, 50대 중반 남성이 호흡 중추가 있는 연수(延髓)의 뇌출혈로 의식불명 상태가 돼 입원했다. 입원 직후부터 환자의 아내와 두 딸은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의사에게 배운 재활 치료법을 온종일 환자에게 적용했다. 김 교수 역시 한 달 이상 병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보호자와 함께 환자를 돌봤다. 입원 45일 째 환자는 기적처럼 의식이 돌아왔고, 몸도 자기 관리는 스스로 할 정도로 회복됐다. “퇴원할 때 불편하지만 스스로 걸어 나가면서 감사 인사를 전하는 환자를 보면서 의사가 된 보람을 만끽했지요.”
물론 치료를 해도 상태가 나빠지는 안타까운 환자도 적지 않다. 특히 점점 근육이 위축돼 끝내 숨을 못 쉬게 되면서 사망하는 근육 위축병 환자는 오랜 세월 환자의 자세를 교정해 주고 관절운동을 시키면서 휠체어를 조절해 주는 식의 치료를 하기 때문에 사망할 때마다 가슴에 묻게 된다.
근골격계 재활치료 전문가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김 교수는 소외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지속했다. 특히 중증 뇌성마비 환자가 있는 경기도 광주의 ‘한사랑 마을’ 방문은 1992년부터 2007년까지 계속했다. 2년 전 왕진 치료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은사가 정년 퇴임 후 그곳 환자를 정기적으로 돌보면서다.
근골격계 재활 치료 전문가인 김 교수는 요즘 들어 부쩍 젊은 층 환자의 방문이 증가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신문에 젊을 때부터 매일 아침·점심·저녁으로 맨손체조나 스트레칭을 15분씩 생활화하라는 말을 꼭 써 주세요. 작업 중엔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히 컴퓨터는 모니터를 눈과 50㎝ 떨어진 곳에 놓고 의자는 컴퓨터 상단이 눈과 수평이 되게 높이를 조정해야 합니다. 자판을 사용할 땐 어깨가 공중에 매달리지 않도록 팔꿈치를 기댈 수 있는 팔걸이 의자가 필요하지요”
절에서 느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고 싶어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김희상 교수. “죽는 날 까지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그의 얼굴엔 인터뷰 내내 자비로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글=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사진=신인섭 기자
박형무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학생 때도, 교수 돼서도 한결 같이 봉사의 길”
박 교수는 김 교수와 진료과도 다르고 근무지도 다르다. 서로 만날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한번은 우연히 학회에서 김 교수와 대면할 기회가 생겨 봉사를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에 대해 물어 봤다.
그랬더니 김 교수는 “나를 필요로 하는 소외계층 환자의 얼굴에서 부처님의 사랑과 자비심을 느낄 수 있어요. 내게 의사로서의 보람과 마음의 평화를 주는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원동력이죠”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이런 의사가 진짜 명의 아닌가요?” 박 교수는 명의 추천 사유를 이 한마디로 요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