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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4년만에 새 창작집 '도라지꽃 누님' 펴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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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소설가 구효서 (41) 씨가 이번 주 새 창작집 '도라지꽃 누님' (세계사) 을 펴낸다. 95년 창작집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이후 4년만이다.

그 사이 작가가 불혹 (不惑) 의 경계를 넘어선 때문일까. 시골마을의 폐가를 수리해 개 두 마리 데리고 혼자 사는 누나의 삶을 소재로 한 표제작을 비롯, 11편의 중.단편들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이름없는 사람들의 반복적이고도 보잘 것 없는 일상을 관찰하는 작가의 시선이 돋보인다.

'소설가 소설' 이라는 비평용어가 나오도록 한 주인공답게, 이번 창작집에도 40 전후의 소설가인 '나' 가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작품들이 다수 실려있다.

그러나 '나' 는 '소설가라는 잘난 체' 를 하지 않는다.

선운사 앞 여관의 여주인이나 ( '나무 남자의 아내' ) 포천에서 수퍼마켓을 하는 친구 ( '포천에는 시지프스가 산다' ) 처럼, 며칠째 같은 책을 손에 쥐고 있는 '나' 역시 하잘것 없는 일상을 반복하는 인물일 따름이다.

그가 가진 특권이라면 소설가가 아니었으면 그저 듣고 흘릴만한 등장인물들의 일상을 기록으로 고정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의 재능이라면 계절이 바뀔 때마다 번갈아 찾아오는 남자들을 기꺼이 몸으로 맞아주고 ( '나무 남자의 아내' ) , 반신불수로 누워있는 아내의 생리일을 기쁘게 준비해주는 ( '포천에는 시지프스가 산다' ) 인물들처럼, 일견 답답하게만 보이는 일상을 반복하는 삶으로부터 반짝이는 결이 비어져나오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실 대다수 보통사람들의 삶을 포괄하는 이같은 반복성은 그의 소설제목을 빌자면, '시지프스' 의 고행같은 것. 이같은 일상을 다소 허무적이면서도 "물 속에서 몇 백년을 묵다가 떠올라온 참나무를 말린 침향 (沈香) 의 고운 향내" ( '나무 남자의 아내' 중) 같은 아름다움으로 묘사하려는 노력은 스스로의 소설 작업 역시 시지프스적이라는 인식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소설가 이력도 어느새 10여년. 서울 노원구의 아파트에서 경기도 남양주군의 작업실로 출퇴근하는 일상에서 모처럼 일탈, 도심의 신문사를 찾은 작가는 "맹렬하기는 했어도 자유롭지는 않았던 30대를 벗어난 지금이야말로 소설쓰기 좋은 나이" 라고 운을 뗐다.

동년배 소설가 이순원 (41). 박상우 (41). 유정룡 (41) .윤대녕 (37) 씨와 함께 '5인방' 으로 몰려다녔던 90년대 중반풍경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누가 좋은 평을 받았다고 하면 가슴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는 그의 익살스런 회고가 한층 재미있게 들린다.

비단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30대 인생이 번뇌하는 무게중심은 세속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욕망. 그런 욕망을 한꺼풀 걷어낸 지금 그는 "독자로부터 '이 친구는 삶의 한 자락을 봤어' 라는 소리를 듣는 게 최고 욕심" 이라고 말한다.

소설가의 하찮은 일상을 공개하면서 소설가적 권위의식, 허위의식을 벗어버리려했던 그의 '소설가 소설' 이 나온 배경에는 역사주의적 거대담론을 부정하는 90년대의 시대적 조류가 있었다는 것이 스스로의 해석.

신화 대신 작은 일상에서 보편성을 끌어내는 것이 자신이 써야할 이야기라고 방향을 잡은 그는 선배소설가 홍명희가 의적으로 그려냈던 임꺽정을 정치적이고 권력지향적인 '큰 도둑' 으로 다시 뒤집는 장편을 다음 작품으로 준비중이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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