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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일자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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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 어제부터 사흘간 전남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 일원에서 명량대첩축제가 펼쳐졌다. 특히 오늘과 내일은 ‘13 대 133의 해전’이 두 차례 재현된다. 지금부터 412년 전인 1597년 이즈음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의 배만 거느리고 왜적선 133척을 물리친 경이로운 울돌목해전의 대승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 승리가 시작되는 곳’이라는 주제 현수막이 자못 비장하다 못해 ‘짠’하다.

# 자고로 진법(陣法)의 세계에서 가장 두렵고 힘든 것이 다름 아닌 일자진(一字陣)이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바다가 운다”하여 ‘울돌목’ 곧 ‘명량(鳴粱)’이라 이름 붙여진 곳에서 13척의 배로 일자진을 쳤다. 한마디로 죽을 각오를 한 것이다. 그리고 왜적선 133척(배후까지 합하면 330여 척)을 맞아 거의 몰살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다.

#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옥포·합포·적진포·사천·당포·당항포·율포해전 등을 거쳐 한산대첩을 이뤄내 명줄이 끊어져가던 조선을 살렸다. 하지만 선조 임금의 시기가 발동돼 조선을 구한 이순신은 졸지에 한양으로 압송돼 투옥되는 처지가 됐다(1597년 3월 4일, 이하 음력). 군공을 날조해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 기요마사의 머리를 잘라오라는 조정의 출항 명령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표면의 이유였다. 이순신은 의금부의 신문을 받던 중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가까스로 출옥해 4월 1일부로 백의종군을 했다. 그 도중인 4월 13일 모친상을 당했지만 임종은커녕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 한편 이순신을 제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올라섰던 원균은 7월 16일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해 이순신이 5년 동안 단단하게 구축해낸 조선수군을 일거에 궤멸의 위기로 몰고 갔다. 그 후 열흘도 채 안 된 7월 23일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됐지만 그에겐 단지 12척의 배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尙有十二隻)”는 불퇴전의 의지로 수군 재건에 나섰다.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백성들을 끌어안았다. 전선을 수리해 12척에 한 척을 더했고 군량미를 확보했다.

# 학익진(鶴翼陣)과 같은 진법을 펼치려면 최소한 수십 척 이상의 배가 필요했다. 이순신은 단 13척의 배만 있었기에 일자진 이외에 다른 진을 구사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사지로 몰아넣고 적을 유인하는 극단의 방법이었다. 일자로 늘어선 13척의 배 밑으로는 바다가 울 정도로 빠른 물살이 순류와 역류로 뒤엉키고 있었다. 배가 한 자리에 멈춰 버티기조차 쉽지 않았다. 너를 죽일지 나를 죽일지 알 수 없는 소용돌이가 거세게 바다를 울리는 울돌목에서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의 각오로 버텼다.

# 8월 19일부터 한 달여에 걸쳐 왜적선과 숨바꼭질을 한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운명의 그날, 9월 16일 13척으로 펼쳐낸 일자진으로 왜적선 133척 중 31척을 바다에 수장시키며 말 그대로 명량대첩을 세웠다. 하지만 채 한 달도 안 돼 10월 14일 이순신은 겉면에 ‘통곡(慟哭)’이란 두 글자가 씌어 있는 편지를 전해 받았다. 셋째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이었다. 왜적들이 울돌목에서 이순신에게 당한 것을 충청도 아산까지 찾아 들어가 이순신의 가족들에게 분풀이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흔들림이 없었다.

# 지금은 울돌목 위로 다리가 놓여졌다. 진도대교가 그것이다. 물살은 여전해서 평균 초속 5.5m다. 가히 바닷물이 울 만하다. 412년 전 이순신이 들었던 그 바다의 울음을 오늘 나도 듣는다. 그리고 순류와 역류가 교차하는 삶의 격랑 위에서 결연한 마음으로 다짐해 본다. 나도 내 마음의 일자진을 치겠노라고! 미련 없이, 두려움 없이, 주저함 없이!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