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부끄러운 문화재 표지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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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즈음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과연 21세기가 문화의 세기라면 이에 대비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점검할 시점이다.

더구나 2002년 월드컵과 그 전야제에 해당하는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앞두고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다.

그 중에서도 문화유적에 대한 표지판을 정비해야 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일제와 6.25전란을 겪으면서 손상된 문화유적을 복원하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남아 있는 문화유적이라도 잘 보존해 표지판을 만들어 세우는 일이 시급하다.

그러나 이 작업은 많은 예산과 시간이 필요하므로 이보다 먼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만들어 놓은 표지판의 오류를 바로잡고 부실한 내용을 보완하는 작업이다.

지금 서울대병원이 있는 곳이 비운의 왕세자인 사도세자를 기리는 수은묘 (垂恩廟)가 있던 경모궁 (景慕宮) 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어갈 때 11세였던 정조는 대궐에 드나드는 대신들을 붙들고 "아비를 살려달라" 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끝내 무위로 돌아가자 통한이 뼈에 사무친 듯 왕위에 올라 부친의 추존 (追尊) 과 복권을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사도세자의 부왕인 영조는 당쟁을 극복하기 위해 탕평정치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왕위계승자인 사도세자의 자격시비에 휘말려 아들을 비명에 죽게 한 아픔을 평생의 한으로 안고 살았다.

그리하여 창경궁 동쪽 언덕바지에 사당을 지어 수은묘라 하고 원통하게 죽은 아들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하였다.

정조는 이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격상하고 아버지를 추모하는 일체의 행사와 의례를 정리해 '경모궁의궤 (景慕宮儀軌)' 로 만들어 놓았다.

바로 이 궁궐의 정원을 함춘원 (含春園) 이라 하여 지금도 그 이름만은 남아 있다.

그런데 수은묘자리에 세워 놓은 표지판의 설명문에는 '중사묘 (重思墓)' 라고 표기돼 있다.

아마도 수 (垂) 자를 중 (重) 자로, 은 (恩) 자를 사 (思) 자로 혼동해 잘못 표기한 듯 싶다.

이것은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지만 확인해보면 이런 경우가 부지기수일 터이다.

이는 무식의 소치라기보다 무성의의 소치라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이렇게 그릇된 안내문을 방치하고 무관심을 계속하는 행위는 조상에 대해 예의가 없는 짓이자 우리 자신의 자존심을포기하는 것이고 외국인에게 스스로 치부를 보이는 일이다.

또 전국 어느 사찰이나 문화유적지에 가봐도 그 설명문은 천편일률적이다.

건축물에 대해서는 '공포' 니 '부연' 이니 하는 전문용어를 동원해 한자 병기도 하지 않은 채 설명하고, 탑에 대해서는 '대석' 이니 '탑신' 이니 '보주' 니 하여 일반인은 무슨 소린지 잘 알 수도 없거니와 도무지 재미가 없게 돼있다.

문제는 껍데기에 불과한 모양새만 양식사 (樣式史) 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고 그 대상에 대한 의미부여가 없다는 점이다.

위에 든 수은묘의 경우 '경모궁의궤' 를 참고해 복원하고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원인을 시대사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지아비를 잃은 슬픔을 '한중록' 으로 풀어낸 사실, 사도세자가 장헌세자로 다시 장조 (莊祖) 로 추존된 과정, 정조가 묘소를 서울의 배봉산에서 수원의 화산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이라 했다가 뒤에 장조로 추존될 때 융릉으로 이름한 사실 등을 엮어 재미있는 이야기로 설명문을 만들어 놓는다면 이곳을 찾는 이에게 실감나는 현장교육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읽기와는 다른 흥미진진한 산 교육이 되어 재미와 교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관광한국은 구호로 되는 일이 아니다.

외국인들이 가장 보고싶어 하고 알고싶어 하는 전통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를 우리 자신이 먼저 하고 있어야 한다.

제대로 알고, 알리기 위해서는 전국의 문화유적이나 기념물에 대해 정확한 역사적 해설을 곁들인 유익한 표지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일은 일조일석에 되는 일이 아니다.

또 막대한 예산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광범위한 기초조사와 학술적 탐구가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예산타령만 할 일이 아니라 우선 수정작업부터 시작할 일이다.

시작이 반이다.

정옥자 서울대교수. 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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