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추격과 모방'산업 끝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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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일본의 경제평론가 오마에의 '한국 백년 하도급 국가론' 이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에서 중간재나 부품을 들여와 단순가공한 다음 미국에 파는 산업구조로는 독자적인 공업국가로 발돋움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과거에도 우리 산업의 위상은 '넛크래커' 에 비유되곤 했다.

즉 고급제품은 일본에 더욱 밀리고 중저급 제품은 중국에 크게 위협받아 우리가 설 땅이 점차 축소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들은 건실한 제조업 기반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첨단산업에 지나치게 기운 우리의 산업관에 좋은 충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마에의 비판은 우리 경제가 발전해 온 특수성을 간과하고 있다.

60년대 산업화 당시 부존자원이 거의 없고, 기술과 자본의 축적이 미흡한 경제 여건에서 가공조립형 산업발전 전략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더욱이 이제는 우리나라의 제조업 기반은 비교적 튼튼하고 세계시장에서도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미국 MIT대의 서로우 교수는 지난 90년초에 아시아신흥공업국 가운데 한국의 미래를 가장 낙관적으로 보았다.

그 이유로서 연구개발 지출이 높고, 고유상표를 키워나가며, 저임을 겨냥한 해외 생산기지 이전 유혹을 뿌리치고 있다는 점을 들었다.

또한 반도체.자동차, 그리고 중공업 부문에서 우리나라의 경쟁력은 중국이나 동남아국가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게 앞서 있다.

이런 뜻에서 오마에류의 지적은 지나친 비관론이다.

우리 산업의 미래는 숙명론적인 귀결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미래에 대한 비전 없이 세계적인 공급과잉에 대한 우려나, 요소가격 경쟁력 취약이나 성숙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관련산업을 쉽게 포기한다면 우리 경제의 소득과 고용 창출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만큼의 순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다.

경쟁기반이 취약하거나 사양산업이라도 새로운 기술이나 디자인.마케팅 전략의 개발이 뒷받침된다면 충분히 고부가가치 유망산업으로 전환될 수 있다.

외환위기에서 벗어나고 구조조정이 막바지 단계에 이른 현시점에서는 앞으로 국내산업을 어떻게 발전시켜 고용을 유지하고 국가의 부를 축적해 나가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 이제는 부실을 떨어내는 차원에서 시스템을 재구축하는 차원으로 구조조정의 방향을 조율해 나가야 한다.

비록 제조업의 재무장이 중요해도 제조업만의 구조조정으로는 경쟁력 향상에 한계가 있다.

디자인이나 소재.유통산업과 같은 관련산업의 발전이 병행되지 않고는 제조업의 발전은 자칫 과거처럼 부품이나 자본재산업의 해외의존도만 심화시킬 수 있다.

단순히 내부비용을 줄이는 생산성 향상 차원을 넘어 산업구조의 재편과 재구축을 통해 개별기업의 비용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켜야 한다.

둘째, 목표와 경로가 비교적 명확했던 과거의 '추격과 모방' 에서 '개척과 창조' 로 성장방식을 전환해야 한다.

기존 방식으로는 투자대상.수출시장.모방대상이 소진됐었을 때 곧바로 성장이 한계에 직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준비나 산업기반 없이 새로운 첨단산업에 무턱대고 뛰어드는 것도 위험하다.

중단기적으로 기존산업의 첨단화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장기적으로는 첨단 신수종 (新樹種) 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자원의 조화스러운 재분배가 이뤄져야 한다.

셋째, 우리 산업 내부에 축적돼 있는 고유의 기술적 성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개발해 국내산업 현실에 맞게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전 세계 기업간 경쟁여건이 동질화되고 성장 지속 요인의 발굴이 용이하지 않은 시대에는 기회를 포착하고 위기를 예방하는 능력이 산업이나 기업 차원에서 중요한 경쟁요인이 된다.

따라서 적어도 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유형.무형의 경제자원이 최대한 활용될 수 있는 한국형 성장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끝으로, 새로운 산업의 선택은 다양성과 개방화를 지향해야 한다.

개척과 창조의 시대에는 기회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발견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정보가 홍수를 이루고, 소비자들의 욕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새로운 밀레니엄시대에는 보다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기업가정신이 꽃을 피우는 시장형 산업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정순원 현대경제연구원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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