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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는 35년이 아닌 4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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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청자 빛 하늘과 선선한 날씨, 이제 본격적인 가을이다. 내게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요즘 나는 구한말에 일어난 사건들을 사색하고 있다.

내년이 한·일 합방 100년이다. 간도 문제는 올해로 100년이 됐고,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지 100년이 되는지라 합방 100년의 전초전으로서 이에 관련된 학술 세미나가 국내외에서 활발히 개최되고 있다.

실제로는 ‘일제 40년’이지만 한국에서는 ‘일제 36년’이라고 했다가 그것이 결국은 ‘일제 35년’이 됐다. 한민족에게는 부끄러운 일제시대가 가능하면 짧은 기간이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일제 치하 기간은 ‘일제 40년’, 혹은 ‘일제 41년’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일제시대의 시작은 1910년이 아니라 1904년 2월에 한·일의정서가 체결됐을 때부터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후 한국과 일본은 1904년 8월에 제1차 한·일협약을 맺었다. 이때 한국은 일본이 추천하는 외교와 재무 고문을 받아들여 외국과의 외교는 일본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는 내용을 강요받았다. 이 제1차 한·일협약은 다음 해 1905년 11월에 강요받게 되는 을사늑약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특히 일본이 추천한 재무 고문을 한국에 둬야 한다는 것은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뜻이었으므로 사실상 1904년 8월 시점에서 일본은 한국의 내정과 외교를 장악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후 고종이 이에 불복해 밀사외교를 시작했고 러시아·프랑스·미국·영국 등지로 그는 밀사를 보냈으나 그것이 발각돼 일본은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을 강요하기에 이른다.

1907년 헤이그평화회의에 이준 열사 등을 밀사로 보내 밀서를 전달하려 한 고종의 고투는 잘 알려져 있다. 일본에 직접 항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던 고종은 각국에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독도 문제에도 응용할 수 있다.

독도가 일본에 편입됐다는 사실을 한국은 일본에 정식으로 항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1905년 일본에 의해 독도가 시마네현으로 편입된 사실은 국제법상 유효하다는 것이 일본의 논리다. 그동안 이에 대해 한국은 당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항의할 수 없었다고 반박해 왔다. 그러나 설명이 구체적이지 않아 제3자가 볼 때는 쉽게 수긍이 안 된다. 일본은 이러한 한국 측의 논리적 약점을 현재까지 이용해 왔다.

그런데 당시의 한·일 간의 협약 등이 이미 1904년부터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삼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고, 최고 권력자인 고종이 일본에 직접 항의를 하지 못해 세계 각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연히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서도 직접 항의하지 못했다는 논리가 나온다. 고종은 밀서 속에 ‘황제는 독립제권(帝權)을 일모(一毛)도 타국에 양여한 적이 없다’고 썼다. 그 내용은 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일모도 타국에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즉 고종이 독도를 포함한 한국 영토 전체에 대한 수호 의지를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본의 침략에 항의한 것이다. 결국 한국은 일본의 독도 침략에 항의한 셈이다. 이 가을에 나의 사색도 더욱 깊어져 간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일본지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