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국민없는 정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합의는 지켜져야 한다 (Pacta sunt servanda) .' 법에 입문하는 학생들이 흔히 접하게 되는 서구의 법언 (法諺) 이다.

민주니 인권이니 하는 근대적 이념에 앞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은 서구사회의 밑바탕을 형성한 근본원리였다.

서구에 비하면 동양사회에서의 합의나 계약에 대한 관념은 전통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내 왔다.

우선 계약의 성립 여부부터 불확실한 경우가 많고, 일단 계약이 이뤄지더라도 계약내용을 명확하고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불확정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수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이같은 견해를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이 나라 최고 정치지도자들이 한여름에 펼쳐보이고 있는 거짓과 약속파기의 권력놀음은 무더위를 더욱 짜증스럽게 한다.

내각제 개헌 유보에 이은 여권의 신당 창당 움직임, 그와 관련해 연일 벌어지고 있는 몰염치한 말뒤집기들, 이런 혼란스럽고 부도덕한 정치권의 행태를 접하면서 도대체 우리나라에서 선거는 무엇이고 또 정당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선진국에서도 선거공약이 모두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공약이행률이 몇 %인가 하는 조사가 종종 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여건의 변화와 같은 객관적인 사정 때문이 아니라 애초부터 지킬 생각이 없는 공약을 내걸었다면 이것은 전혀 성질이 다르다.

신당 창당 문제도 그렇다.

정책이나 노선이 근접한 정당들이 서로 연립을 형성하는 것은 있을 수 있고, 때로 필요하기도 할 것이지만 정당의 정체성 (正體性) 자체를 바꾼다는 것은 유권자의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다.

하물며 정책과 노선이 서로 대극적인 정당들끼리 합당을 꾀한다면 이것은 그저 아연할 수밖에 없는 정략극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런 엄청난 일들이 정당의 우두머리들끼리의 밀담을 통해 결정됨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과연 민주국가의 정당인가 하는 회의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주목할 것은 이런 일들이 거듭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태우 (盧泰愚) 전 대통령은 선거공약이었던 중간평가를 실시하지 않았다.

지금 비슷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지난 90년의 3당 합당은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는데 지금 비슷한 일이 반복되려 하고 있다.

전두환 (全斗煥) 전대통령과 盧전대통령은 그들의 임기 중 내각제개헌을 통한 집권연장을 꾀했었는데, 앞으로 그 비슷한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거짓말정치, 약속파기 정치, 국민 없는 정치가 거듭되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다.

그들은 유권자들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아무리 비난과 욕지거리를 당하더라도 바람이 한차례 지나고 선거 때가 되면 또다시 지역이라는 연고에 따라 표를 찍어줄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금 직시해야 할 것은 바로 지역주의적 투표행태다.

정책이나 노선 또는 인물보다 자기 지역에 기반을 둔 정당이기 때문에 투표하는 행태가 변하지 않는 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국민없는 정치' 는 지속될 것이다.

내각책임제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도 다른 데 있지 않다.

지금 우리의 정치현실에서 내각제가 비판받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지역정당체제 또는 지역할거정치를 고착시키는 제도적 보장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견해에 따라서는 이미 정치적 지역갈등은 돌이키기 힘든 지경에 이른 만큼 이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지역적 권력분점이 가능한 내각제를 채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없지 않다.

그러나 세계에서 보기 드문 강력한 민족적.국민적 통합을 이어온 우리가 '3金' 이라 불리는 3인의 동시대 정치인 때문에 그 소중한 자산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전국정당화' 라는 명분도 마찬가지다.

그럴듯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울림에 그치고 마는 까닭은 그 실체가 지역정당들의 연립체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역주의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지역주의와 같은 연고주의는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사회구성의 바탕이다.

때문에 단시일 안에 이것이 극복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렇더라도 무언가는 해야 한다.

유권자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시민운동도 그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양건 한양대 법대학장.헌법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