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오·최시중·김부겸… 동문들이 대통합 끌어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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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정치학과·외교학과가 53년 만에 통합한다. 2010년부터 정치외교학부로 승격
해 학생 정원 늘리고 교수 숫자도 증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이달 안으로 통합 논의가 결론이 난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한 뿌리였던 서울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다시 합쳐진다. 1956년 정치학과에서 외교학과가 분과해 나간 지 53년 만이다.

통합 시점은 2010년. 내년 새학기부터 통합과 함께 두 학과는 ‘정치외교학부’로 승격하게 된다. 현재 두 학과 모두 27명씩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다. 그러나 승격과 더불어 학생 정원도 대폭 늘어날 전망이다.

서울대 총동창회(회장 홍성목)는 25일 “이장무 총장이 정치학과·외교학과가 학부로 통합하는 것을 전제로 정치외교학부 학생 및 교수 정원을 늘려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밝혔다. 총동창회 측은 “그동안 통합에 반대 의사를 밝혀왔던 외교학과 교수진이 지난 8월 17일 교수총회를 열고 이 총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함으로써 정치외교학과의 통합이 성사되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양과는 정치학과 박찬욱 교수와 외교학과 윤영관(전 외교부 장관) 교수를 중심으로 ‘6인교수회의’를 만들어 학부 승격 및 정원 증원에 따른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6인교수회의는 이달 말까지 통합에 따른 모든 주요 논의를 완료한다는 목표다.

이승만 대통령 영향으로 외교학과 분리
이승만 대통령 시절 분리돼 50여 년간 독자적으로 학맥을 이어온 양과의 통합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특히 외교학과 쪽의 반대가 컸다. 이때 통합의 물꼬를 튼 것은 양과 동문들이었다.

이 대학 외교학과 출신의 김형오 국회의장, 홍사덕 의원, 홍성목 정치·외교학과 통합총동창회장 등과 정치학과 출신의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김부겸 의원 등이 최근 이장무 서울대 총장과 양과 교수들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동문들은 양과 교수들에게 두 학과의 통합을 강력히 주문했다.
한 동문은 “공직 사회에서 다수를 차지했던 정치·외교학과 출신들이 어느덧 마이너리티가 됐다”며 “학생 정원이 27명에 불과해 지금은 학과 같지도 않다”고까지 말했다.

이장무 총장도 양과의 통합을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그는 “현재 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에서도 역사학과로 통합하는 경우 어떤 인센티브를 줄지 묻고 있고, 서울대에 인도와 아랍권에 대한 언어 문화권 학과가 없어 종교학과를 이들 문화권을 아우르는 ‘문명종교학부’로 승격시키자는 논의도 있다”면서 “정치외교 분야, 역사 분야, 인도·아랍 문명권 분야 등 3개 분야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 분야이니 이들 분야를 담당하는 학과들이 통합해서 나간다고 할 때는 도움을 줘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외교학과 교수들만은 부정적 견해를 나타냈다.
한 교수는 “고려·연세대 정외과의 위상 제고와 국제학부의 성장과 같이 외교학과 안팎으로 도전이 많다”며 “이런 요인들을 고려해 학과의 발전 방안을 먼저 논의하고 나중에 통합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교수는 “양과가 나누어진 지 50년이 지나서 이제 각각의 정체성이 형성됐기 때문에 하나의 학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며 “정치학과와 합쳐야 할지 국제학부와 합쳐야 할지도 더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김형오 국회의장은 “왜 학과 통합 문제를 중장기적인 과제로 넘겨야 하느냐”면서 설득에 나섰다.

그는 “앞으로 서울대에도 국제학부를 설립해야 한다는 요구를 막을 수 없을 것인데, 이는 외교학과에 위기일 수 있다”며 “그렇게 되면 외교학과는 존립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최시중 방통위원장도 “대한민국이 방송통신의 통합 시기를 놓쳐 정보기술(IT)산업이 곤경에 빠져 있다”며 “이대로 가다간 정치외교학과도 똑같은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거들었다.

홍사덕 의원은 “외교학과가 여학생을 키우는 학과로 가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현재 외교학과는 최근 들어 정원의 70% 안팎이 여학생들로 채워지고 있다고 한다.

홍 의원은 “인재를 균형 있게 키워내는 것이 국립대학에 보탬이 되는 것”이라고 거듭 설득했고, 김부겸 의원도 “(통합을 반대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우수한 학생들의 다양한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동문들의 파상적인 설득에 외교학과 교수들도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장무 총장은 “(양과가 통합할 경우) 학칙을 개정해서라도 학부 내 (외교)전공을 인정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새로운 카드를 제시했다.

현재 서울대 학칙상 학부안에서의 전공은 인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서울대 경제학과와 국제경제학과(무역학과)는 95년 경제학부로 통합했으나 무역학 전공이 따로 인정되지 않는다.그러나 서울대 정치외교학부가 만들어지더라도 따로 외교학이나 정치학 전공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통합 시 파격 지원 약속한 이장무 총장
이런 이 총장의 약속과 동문회의 설득에 통합에 반대했던 외교학과 내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지난달 7일 이 총장과 외교학과 윤영관·박상섭 교수의 면담에서 사실상 통합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이날 이 총장과 윤·박 교수는 “굳이 조건을 앞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학과 내부에서 의견이 합쳐지려면 내세울 매력이 있어야 한다”며 학생 및 교수 증원을 건의했다.

이 총장은 당초 약속했던 학생 정원 증가를 확인하면서 “20년 동안 사회대 교수가 늘어나지 않아 왜 사회대만 교수 정원이 늘지 않았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이 역시 합치는 것을 전제로 늘려드리겠다”고 흔쾌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이 총장은 “늘어난 정원은 양과가 합치기만 하면 내년부터 적용도 가능하다”며 “우선적으로 학부로 통합하고 학부 내 전공을 유지하면서 차츰 교과과정도 변환하고 합병은 점차적으로 하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윤영관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세계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현재 서울대 정치학과와 외교학과의 정원은 다 합쳐도 연세대나 고려대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며 “이런 시대에 역행하는 구조에 대해 교수들의 위기의식이 컸던 게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한 집안이었던 두 학과가 각기 독자적 학문 영역을 구축해 온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영향이 컸다. 이 대통령이 전문적인 외교관 양성 학교를 만들고 싶어해 결국 정치학과에서 외교학과가 분리돼 나온 것이다. 분가의 이면에는 일본 게이오대 출신의 공삼 민병태(閔丙台) 교수와 연희전문 출신의 동주 이용희(李用熙) 교수 간 자존심 경쟁도 자리 잡고 있었다는 평가다. 그러나 학계 두 거목의 자존심 경쟁은 오히려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독자적으로 학맥을 구축하게 만든 초석이었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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