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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과학 세례 받았지만, 전통을 고루하다 생각 안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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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호 06면

저우유광(周有光)은 청(淸) 광서제 32년(1906년) 1월 13일 장쑤(江蘇)성 창저우(常州)의 유서 깊은 골목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마지막 황제 푸이보다 생일이 하루 빨랐다. 혁명을 하겠다며 가출했던 장제스는 같은 해 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아버지의 강요로 학업을 중단한 소년 마오쩌둥은 농사일을 거들며 울화를 삭히고 있었다.

‘한어 병음의 아버지’ 저우유광

교사였던 부친은 평생 고집을 부려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고문을 가르쳤지만 백화문도 반대하지 않았다. 조모는 고급 지식인이었다. 동네 사람들의 편지나 고소장을 써줬다. 손자에겐 3살 때부터 당시(唐詩)를 가르쳤다. 96세로 죽는 날까지 청력과 시력이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 조부는 면방직 공장과 전당포를 하는 기업가였지만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자 창저우 성 방어에 재산을 탕진했다.

저우유광은 민주(民主)와 과학(科學)의 세례를 듬뿍 받았지만 전통적인 것을 고루하다고 여겨 본 적이 없는 지식인이다. 같은 또래들이 으레 다니던 사숙의 문턱을 밟아보지 못했다. 남자애들에게 조기 교육은 건강과 발육을 망친다는 게 조모와 모친의 신조였다.

창저우 중학은 중국 고전을 엄하게 가르쳤지만 지리·역사·화학·물리·생물의 교재는 영어로 돼 있었다. 수업도 영어로 했다. 영어 과목은 아예 없었다. 외교관이나 정계에 진출한 졸업생이 많았다.

저우는 상하이의 세인트존스 대학 시절부터 한자의 라틴어 표기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환경 때문이었다. 대학도 모든 게 영어였다. 중국문학과 역사시간에만 중국어를 사용했다. 영문을 이용하면 업무를 과학적으로 처리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를 갖게 됐다.

대학 졸업 후에는 교사를 하며 은행을 다녔다. 당시 상하이는 라틴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각종 방언을 라틴화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저우유광과 한 골목에서 자란 공산당 서기 추치우바이(瞿秋白)가 소련에 갔다가 소수민족의 언어들을 라틴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돌아와서 주도했다. 저우유광은 방언보다 표준어의 라틴어 표기에 관심이 많았다.

저우는 1933년 상하이에서 장윈허(張允和)와 결혼했다. 장윈허는 ‘쑹(宋)씨 3자매’ ‘푸(浦)씨 3자매’와 함께 명성이 자자했던 ‘허페이(合肥) 4자매’ 중 둘째였다. 안후이 최고 가문에서 풍요로움을 만끽하면서도 허전함을 가누지 못하던 저우의 장인은 가산을 정리해 쑤저우에 여학교를 설립하고 돈을 쏟아부었다. 슬하의 6남4녀에게는 대학교육뿐 아니라 전통교육까지 호되게 시켰다. 딸들이 사귀는 남자친구들의 집안이나 학벌 같은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은 멋쟁이였다. 저우는 그렇다 치더라도 큰사위는 경극배우였고 셋째 사위 선충원(沈從文)은 후일 대작가로 성장했지만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벽촌 출신이었다.

저우의 부인 장윈허는 중국의 전통오락 중 최고의 우아함을 자랑하는 곤곡(昆曲)의 명인이며 명번역가였다. 수많은 외국 작품을 중국어로 옮겼고 문화혁명 후에는 베이징곤극연습사 사장을 지냈다.

중국의 20세기는 고난의 시대였다. 혁명과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통치자들은 지식을 소중히 여겼지만 지식인들은 경멸했다. 지식인들은 가족들 몰래 수면제를 사 모으고 마른 우물이나 호수 근처를 어른거렸다. 선택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은 맞아 죽거나 하루아침에 종적이 묘연했다. 폐인으로 전락하고 평균수명조차 채우지 못한 사람이 허다했다.

며칠 후면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60주년을 맞이한다. 세계를 놀라게 한 수많은 사연들을 연출했지만 핵심은 한국전쟁 참전, 문자개혁, 문화혁명, 개혁·개방으로 압축된다. 나머지들은 전주곡이나 속편에 불과했다. 문자개혁의 중심인물이었던 ‘한어병음의 아버지’ 저우유광은 104세이지만 두 눈은 여전히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재미학자 위잉스(余英時)는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찬탄했다. 본인은 “염라대왕이 깜박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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