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425.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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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9장 갯벌

결혼이라면 박봉환이가 한 발 앞선 셈이었다. 한씨네가 영암장과 영산장의 장꾼들과 안면을 익혀 조개류를 팔아 본전치기로 가까스로 체면이나마 갖춰가고 있을 무렵, 안면도 백사장 포구의 서문식당에서는 조촐한 결혼식이 올려지고 있었다.

가까운 도시의 번듯하고 야단스런 결혼식장을 마다하고 갯내나는 서문식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정한 것은 봉환과 희숙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 하객들을 불러 떠벌릴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식을 올리자마자 봉환은 희숙을 남기고 곧장 떠나야 할 처지였다. 그래서 뱃사람 이십여명이 모여 좁은 술청 안에서 치른 조촐한 결혼식은 처음부터 쓸쓸하고 울적했다.

신부인 희숙은 예식을 치른 이후라도 포구에 남아 남편을 기다리고 있어야 했고, 신랑인 봉환에게는 전도가 불확실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완호 내외를 제외하면, 하객들 대부분이 신부측 일가 친척들이었다.

그들 역시 신부에게 과거가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갓진 곳에서의 조용한 예식을 선택한 것을 다행으로 알았다. 그래서 간단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하객들의 시선은 앞에 있는 신랑신부에게 집중되었다기보다는 문밖의 동정에 쏠려있기도 했었다.

옛날에 사귀었던 사람이 불쑥 나타나 숙연했던 예식장을 한낱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사례가 심심찮게 발생하였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의식이 끝나고 하객들이 웅기중기 식탁에 둘러 앉을 때까지 염려했었으나, 어쩌면 마음 속으로부터 희미한 기대나 호기심도 없지 않았던 불상사는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하객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는 신부의 표정은 시종 평온해 보였다.정신과에 입원까지 했었던 혼란의 흔적은 그녀의 표정이나 행동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다소곳하고 정숙한 여자의 자리로 불현듯이 되돌아가 있었다. 식탁으로 음식과 술이 나오고 순배가 거듭되면서 하객들은 이제 걱정스러웠던 모든 것들을 깡그리 잊고, 먹고 마시는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가운데 놓인 식탁에 앉아있던 신랑신부가 짝지어 일어나 하객들에게 술 한잔씩을 부어올리게 되면서 분위기는 한껏 무르익었고, 하객들의 대화는 신랑측 하객들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을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잠깐이었고, 대화는 역시 하찮은 일상사들로 되돌아갔다. 신혼여행은 지난번 두 사람이 함께 다녀온 동해안여행으로 대신하기로 한 그들의 결혼식은 그렇게 치러졌다.

갓을 먼저 쓰고 망건은 뒤에 쓰게 된 꼴이 된 것은, 인천부두에서 중국의 산둥 (山東) 성 웨이하이 (威海) 시로 떠나는 선편의 날짜가 임박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보름동안, 태호 혼자 뛰어 출국에 필요한 서류들을 갖춘 것이었다. 물론 짧은 시간에 그런 일을 치러낸 것에는 비밀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손씨나 박봉환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양양에서 저질러졌던 사건은 태호를 비롯한 두 사람이 그럴싸하게 짐작했었던 것처럼 간단하게 마무리될 조짐이 아니었다.

그들의 실수는 경찰을 미련한 집단으로 여긴 것이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 두 사람의 행방을 은밀히 뒤쫓고 있다는 소식이 양양의 도매상으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태호는 신통하게도 출국서류를 마련하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자동차를 잃었으니 배를 탈 수밖에 없었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쫓겨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식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희숙의 채근이 없었다 할지라도, 떠나야 할 봉환에게는 무엇보다 절박한 것이었다. 철새처럼, 그리고 바람처럼 떠돌았던 이 땅 어딘가에는 자신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며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었으므로 결혼식은 서둘러야 했었다.

그것이 또 희숙으로 하여금 마음의 안정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봉환은 드디어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혼란스럽고 착잡한 가운데서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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