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정 기자의 클래식 상담실]Q '막장 오페라’가 많은 까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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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호 05면

오늘의 등장인물을 소개합니다. ①약혼녀의 동생을 사랑하게 된 남자, 조카의 애인을 사랑하는 고모 ②각각 다른 바다에서 사고를 당하고 똑같은 무인도에 도착하게 된 자매 ③애인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살해한 딸, 복수로 그녀를 살해하는 오빠.
그럼 이들을 다음의 공식에 대입해 볼까요? ⓐ얽히고설킨 인물 관계 ⓑ무리한 설정 ⓒ자극적인 장면.

어떤가요. 위의 예가 아래의 설명에 잘 맞아떨어지지 않나요? ①은 이탈리아 작곡가 치마로사의 오페라 ‘비밀결혼’ ②는 하이든의 ‘버려진 섬’ ③은 베르디의 ‘운명의 힘’에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우아한 고급 문화로 풀이되고 있는 오페라 말이죠.
그럼 ⓐ~ⓒ는 뭘까요? 바로 ‘막장 드라마’에 대한 한 인터넷 사이트 사전의 정의랍니다. 사전에는 한 문장이 더 있습니다. “현실에서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에피소드가 수십 분에 한 번씩 벌어지곤 한다.” 그간 봤던 오페라 몇 편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네. 오페라는 요즘 비판받는 막장 드라마가 무안할 정도로 황당무계한 것이 많습니다.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던 아버지는 순식간에 마음을 바꾸고(‘라 트라비아타’), 애인을 냉정하게 차 버린 여인은 갑자기 그를 찾아가 무릎을 꿇죠(‘마농’). 물론 오페라의 원작인 문학 작품에서는 좀 더 세밀하게 그려졌지만, 오페라 무대에서는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에피소드’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 세 시간 동안 공연되는, 영화보다 훨씬 긴 오페라를 보고 나면 스토리가 황당하다는 기억밖에 안 남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왜 그럴까요?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기 때문일까요?

여기서 오페라 역사의 해묵은 논쟁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 오페라는 ‘음악 vs 드라마’의 비중을 놓고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극의 구성보다 아름다운 선율과 성악가의 기교 등이 중요한 이탈리아 오페라는 ‘주도권’을 쥐고 오랜 시간 오페라 양식을 지배했죠. 위에서 예로 든 것들은 이처럼 음악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작품들입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음악회가 드라마라는 옷을 입은 것일 뿐”(오페라 칼럼니스트 유형종)이라는 의견도 있죠.

‘오페라의 제왕’으로 불리는 로시니는 심지어 황제의 대관식을 기념하는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여정 중간에 있는 온천에 들렀다가 노래 자랑만 잔뜩 펼치고 대관식에는 가지도 못하는 등장인물들을 잔뜩 그려 내고는 작품을 끝내 버리기도 했답니다(‘랭스 여행’).

그러니 오페라를 영화ㆍ드라마 보듯 보려다가는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얽히고설킨, 엉망진창 스토리가 오히려 매력일 수 있죠. 음악에 열중한 작곡가들이 ‘대충’ 처리해 버린 줄거리를 알아보는 것 또한 오페라의 쏠쏠한 재미니까요. 그래도 ‘막장 드라마’에는 없는, 기가 막힌 음악이 있는 게 바로 ‘막장 오페라’의 세계랍니다.

A 엉망진창 스토리도 매력


중앙일보 문화부의 클래식·국악 담당 기자. 사흘에 한 번꼴로 공연장을 다니며, 클래식 음악에 대한 모든 질문이 무식하거나 창피하지 않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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