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알면 더 재미있다] 29. 신궁 한국 견제 '고무줄 경기 방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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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archery)은 한국의 효자종목이다. 1984년 LA 올림픽 대회 서향순을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까지 금메달만 모두 11개가 나왔다. 하지만 정작 한국의 양궁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우리에겐 전통 국궁이 있었다. 서양에서 개발된 양궁이 국내에 처음 들어온 건 50년대 중반, 미군을 통해서였다. 그리고 국제양궁연맹(FITA)에 가입한 건 63년이다. 그리고 72년에 가서야 전국체전 종목으로 채택됐다.

늦게 시작한 한국 양궁이 급성장한 계기는 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이었다. 김진호(한체대 교수)가 여자개인전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국제무대 첫 우승. 이후 미국 등이 강세를 보였던 세계 양궁 판도는 한국으로 기울었다.

한국의 독주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FITA에서 한국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경기방식 변경으로 나타났다. 당시의 규정은 4개 거리(남자 90.70.50.30m, 여자 70.60.50.30m)에서 각각 36발씩 쏘는 싱글 라운드를 두 번 반복해 그 합계점으로 순위를 매기는 '더블 라운드'. 그러나 FITA는 88년 서울 올림픽 때 '그랜드 피타 라운드'라는 다른 방식을 채택했다. 먼저 싱글 라운드로 예선을 치러 24강을 가린다. 그리고 본선에 오른 24명을 4개 거리에서 9발씩 세번 쏘게 해 다시 8명을 골라낸다. 이어 이들 8명이 다시 4개 거리에서 36발을 쏘게 해 최종 1~8위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잘 쏘는 선수도 중도에 한번 삐끗하면 탈락하도록 두개의 관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은 김수녕이 여자개인.단체 등 4개 금메달 중에서 3개를 휩쓸었다. 4년 뒤 바르셀로나 대회 때 FITA는 방식을 또 바꿨다. '올림픽 피타 라운드'. 예선에서 싱글 라운드로 64강을 추려낸다. 그리고 본선에 오른 64명은 1대 1 토너먼트 방식으로 맞붙는다.

과녁까지 거리는 70m. 중도탈락 가능성을 더 크게 한 것이다. 70m라는 먼 거리를 채택한 것도 서양선수들에게 체력적으로 딸리는 한국 선수들에게 불리한 요소다. 하지만 아무리 제도를 바꿔도 '신궁'이라 불리는 한국 양궁팀은 여전히 세계 최강이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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