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료를 걷어낸 담백함, 박근형의 체호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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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호 04면

7, 8월에는 연극 동네 대학로도 한산한 편이다. 세계의 여러 나라 공연계가 그렇듯 한국도 여름철에는 지역마다 특색 있는 야외 페스티벌이 많아지기 때문에 관객들의 서울 탈출도 많아진다. 자연히 극장은 비수기가 된다. 드문 공연들 속에서도 8월 한 달 동안 유난히 눈에 띈 공연은 박근형 연출의 ‘갈매기’였다.

연극 ‘갈매기’, 30일까지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 문의 02-6012-2845

박근형은 극작 연출가로서 직접 쓰고 연출하는 작품들로 15년 가까이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해 왔으므로, 그의 사단인 골목길 극단은 연극계에서는 드물게 뚜렷한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다. 그가 직접 쓰고 연출한 작품이 뿜어내는 명쾌하고도 발랄한 기운은 관객 연령층의 경계선을 쉽게 허물어 버리곤 했다.

‘청춘예찬’ ‘대대손손’ ‘경숙이, 경숙아버지’ ‘선착장에서’ ‘너무 놀라지 마라’ 등 지금까지 선보여 온 박근형표 골목길의 작품은 현대 가족의 붕괴와 해체를 근간으로 한 흡입력 강한 작품이었다. 박근형은 마치 한국 하이퍼리얼리즘(극사실주의) 연극의 ‘원조’라는 평가에 보답하듯이 압축과 생략의 연출 기법과 지나칠 정도로 사실적인 정황 묘사와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아찔한 경험을 안기곤 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연출할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그의 이런 강점이 감소되는 경향도 엿보인다. 이강백의 ‘맨드라미’, 고연옥의 ‘일주일’, 셰익스피어의 ‘햄릿’ 등의 예가 그랬다. 그의 언어로 쓰이지 않았던 작품들은 어쩐지 골목길 연극답지 않게 싱거운 듯 평이해 보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거쳐 자신의 작품을 연출할 때가 훨씬 더 큰 효과와 반응을 끌어낸다는 사실을 그는 분명 알고 있을 텐데도, 최근 그의 행보는 의외로 남의 것(세계 명작)에 맞춰지고 있다. 지난해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이어 올해는 체호프의 ‘갈매기’에 손을 댔고, 꼭 하고 싶은 작품 리스트에는 ‘레이디 맥베스’도 들어 있다.
이런저런 궁금증이 증폭되던 터에 이번에 공연한 ‘갈매기’는 나름의 해답을 주는 무대였다.

‘갈매기’는 골목길의 간판 배우들인 김영필·김주완 외에 서이숙·장영남·이대연·박원상·정세라 등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타 극단의 배우들이 대거 등장했다. 출연진으로만 기대하자면 ‘갈매기’는 ‘탄탄한’ 체호프의 흔한 작품 중 하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만큼 무대에 익숙한 베테랑 배우들의 조합이었으니까.

그러나 박근형의 명작 무대가 해갈시켜준 반가운 해답은 그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아니라 뜻밖에도 그 탄탄한 연기력의 ‘힘 빼기’에서 드러났다. 각자 한 가락 하는 개성파 배우들이 마치 연기를 처음 하는 사람들처럼 어깨와 허리, 가슴에 붙어 있던 군더더기 살(힘)을 빼기 시작하자 100여 년 전 체호프가 말하고 싶어 했던 바 “무대 위의 삶은 정말로 있는 그대로여야 한다”는, 살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대는 비워진 채로 시작된다. 이 오래된 고전을 재생할 때 연출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아이디어 소품이나 화려한 장치, 아름다운 이국적 풍경 등은 될 수 있는 한 제한되었다. 무대에도 기댈 수 없고, 장치에 기댈 수도 없고, 원작의 언어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 없던 배우들은 말 그대로 벌거벗은 채 무대에 섰다.

그러자 작품 속의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났다. 원작의 텍스트 위에 장치 등과 같은, 어쩌면 불필요한 조미료를 걷어버리자 오롯이 텍스트가 읽혔고, 오롯이 배우가 보였다. 특히 이젠 여성 연기자로 정상급에 다다른 서이숙은, 이미 정형화한 아르카지나의 모습과 전혀 다른 ‘서이숙만의 아르카지나’를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곳에 정답이 있었다. 남의 작품을 연출할 때 박근형의 강점은 텍스트를 함부로 훼손하지 않으면서, 무엇보다 배우들이 돋보이는 무대를 만들어 낸다는 것. 앞으로 ‘갈매기’는 박근형 전설의 모뉴먼트가 될 수 있을까? 늘 재공연을 거쳐 훨씬 다듬어진 작품을 내놓는다는 그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갈매기’는 8월 말 막을 내린 이후에도 언젠가 있을 재공연 무대를 손꼽아 기다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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