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뜨거운 예산 전쟁 … 칼 같은 원칙으로 버텨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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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올해는 예년보다 일찍 총성 없는 ‘예산 전쟁(budget war)’이 가열되고 있다. 정부 부처별로 기획재정부와 내년 예산안의 윤곽을 짜느라 신경전이 한창이다. 이미 여기저기서 유탄이 난무하고 있다. 최근 국방부 장관과 차관과의 내분이나, 국방부 장관이 기재부 장관과 청와대에 항의서한을 보낸 것도 예산 전쟁의 후유증이다. 얼마 전 국토해양부의 한 국장은 기재부의 예산담당자를 찾아가 “도로예산을 너무 깎는다”며 드잡이 일보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지난번 예산 당정협의 때는 50명이 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몰려들었다. 자신들의 지역사업 예산에는 절대 손대지 말라는 무력시위를 벌인 것이다.

2010년 예산 편성은 사상 최대의 격전장이 될 게 분명하다. 우선 예산 한도부터 올해보다 줄어든다. 올해는 경기 부양을 위해 28조4000억원의 추경예산안을 편성했지만 내년에는 재정적자를 감안해 추경 편성이 어렵다. 기재부에 따르면 내년 본 예산은 올해보다 4.9%가량 늘어나겠지만 추경예산까지 포함하면 올해보다 오히려 1.1%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반면 내년부터 4대강 사업과 행정복합도시 등 대형 국책사업에 뭉텅이 돈이 들어간다. 그 반작용으로 다른 분야의 예산은 삭감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다 내년 5월 지방선거 재선을 노리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나 지역구 의원들은 예산 따내기에 혈안이 되고 있다.

지금 예산 당국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원칙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정부 부처와 지자체들은 지난 몇 년간의 팽창예산에 젖어 있다. 예산 당국 스스로 칼 같은 원칙을 세우지 않으면 이런 웰빙 체질을 바꿔놓기 어렵다. 우선 이명박 정부가 ‘작은 정부’를 공약해 집권했다는 사실부터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정권 출범 초기에는 경제위기로 다소 흔들렸지만 내년부터 다시 ‘알뜰 예산’의 원칙으로 복귀해야 한다. 알뜰 예산을 짜려면 계속 사업을 제외한 신규 사업은 최대한 억제해야 한다. 중복·낭비로 지적된 사업은 곧바로 중지시키고, 비효율적인 예산 집행과 오남용 사례가 드러난 경우는 이번 예산 편성 때 반드시 불이익을 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산 당국이 과감히 성역에도 도전하기를 기대한다. 4대강이나 행복도시 사업까지 경제효과를 정밀히 따져 가차없이 메스를 들이대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성역으로 둔갑한 연구개발(R&D) 예산은 내년에도 대폭 늘어날 게 분명하다. 하지만 R&D 예산만큼 ‘눈 먼 돈’으로 인식돼 낭비되는 경우도 없다. 예산 절감을 위한 치밀한 관리체계를 세워야 할 것이다. 예산 당국이 가장 주력해야 할 것은 정치권의 예산 나눠먹기 행태를 차단하는 일이다. 지난해 경제위기 때도 극성 부린 고질병이다. 특히 한나라당은 3년 전 국가재정법을 주도한 당사자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전쟁·자연재해·대량실업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추경 편성조차 못 하도록 엄격히 제한하지 않았던가. 예산 당국은 확고한 원칙에서 한 발도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