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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어야겠지요, 그러나 포기해선 안 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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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경부고속도로에서 그린벨트까지, 무릎을 치게 하는 박정희의 선견지명은 널려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멀리 내다보는 것도 탈이다. 이 4개 학과는 너무 일찍 태어난 조산아(早産兒)들이다. 거액의 돈과 오랜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사치스러운 학문이다. 고작 신발이나 가발을 내다팔던 한국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도 학부 대신 대학원 과정에나 개설했던 귀족형 학과였다.

당장 돈이 안 되는 학과가 외면받는 것은 당연했다. 계열별 모집 때는 학과 정원조차 못 채우기 일쑤였다. 학생들 사이에도 자조 분위기가 만연했다. 오죽하면 건배사가 “우리는 천해(천문학과, 해양학과의 앞머리글자)!”였을까. 졸업해도 찬밥 신세였다. 일부 국책연구소를 빼면 갈 데가 없었다. 이들이 주축이 된 원자폭탄이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은 미국의 압력으로 물거품이 됐다. 우주와 바다를 누비기에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했다.

이들 비운의 마이너리그 과학자들에게 2009년은 정말 의미 있는 한 해다. 실패와 좌절 속에서 이를 악물고 갈고닦은 작품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른다. 나로호가 첫 테이프를 끊었고, 다음 달에는 첫 쇄빙선 아라온호가 극지의 물살을 가른다. 12월에는 한국형 원전의 중동 수출 여부가 결판난다. 이런 좋은 날에도 그들은 웃지 않는다. 여전히 어두운 표정이다. 스산한 과거의 경험 때문에 긴장을 풀지 못한다.

쇄빙선 아라온호만 해도 그렇다. 3년 전 영국의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최대 격전지로 북극을 지목했다. 지구온난화의 역설이다. 빙하가 녹으면서 중동의 3배에 달하는 원유·가스 등이 서서히 노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 해양학계는 10년 전부터 쇄빙선을 노래 불렀다. 그러나 정부는 꿈쩍도 않았다. 오히려 해양연구원과 극지연구소는 과학기술부에서 해양수산부로, 다시 교육과학부로 3차례나 옮겨 다니기 바빴다.

아라온호가 탄력을 받게 된 것은 엉뚱한 이유 때문이다. 여수 세계박람회 유치가 결정적이었다. “해양 엑스포를 여는 나라에 쇄빙선 하나 없으면 말이 되겠느냐”는 체면론(體面論)이 등장한 것이다. 국토해양부는 2년 만에 뚝딱 아라온호를 지었다. 하지만 해양학자들은 벌써부터 아라온호의 외로운 항해를 걱정한다. 달랑 쇄빙선 1척을 극지로 보내는 선진국은 없다. 미국은 서로 돕도록 반드시 2~3척의 쇄빙선을 한꺼번에 보낸다. 자칫 얼음에 갇히면 몇 달씩 꼼짝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라온호는 얼음을 깨기보다 얼음을 피해 다니는 쇄빙선이 될지 모른다.

그들의 첫 작품인 나로호 발사도 결국 절반의 실패로 끝났다. 나는 이튿날 신문에서 머리를 감싸 쥐고 눈물을 글썽이는 한 나로호 연구원의 사진을 보았다. 마음이 짠했다. 외로운 외나로도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매만져온 첫 꿈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엄청난 충격이었을 게 분명하다. 아니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을지 모른다. 추가 발사 실패에 대한 두려움도 떨치기 힘들 것이다. 이들 마이너리그 과학자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한두 번의 실패와 실수는 넘어가겠지만, 주변의 시선이 싸늘해지면 얼마나 비참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런 불길한 징조는 이미 인터넷 댓글에서 얼핏 읽힌다. 나로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직후 누리꾼들은 “나로호를 만든 지도자는 DJ” “노무현의 공이다” “씨를 뿌린 것은 박정희”라며 다투었다. 그러다 궤도 진입 실패 소식이 날아들자 서로 헐뜯기 바빴다. “○○가 있으면 되는 일이 없다” “○○ 묏자리를 잘못 썼다”…. 이런 정치적 난도질이 판치는 나라에선 과학자들이 설 자리가 없다. 상처받은 마음을 두 번 할퀴는 잔인한 짓이다. 캄캄한 어둠을 견디며 여기까지 버텨온 그들에 대한 기본적 예의가 아니다.

나는 나로호 연구원의 눈물을 보면서 해양학과에 다니던 친구를 떠올렸다. 모집정원은커녕 달랑 학생 5명만 남았던 초미니학과였다. 그 친구는 지치거나 외로울 때면 카세트테이프가 닳도록 ‘작은 별’을 틀곤 했다. “일이 뜻대로 안 될 때/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매사가 벅차게 느껴질 때/…/그때는 쉬어야 되겠지요/그러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겉을 뒤집으면 안이 나오듯이/성공이란 다름 아닌 실패를 뒤집어 놓은 겁니다/…/멀다고만 생각되었던 그 길이/뜻밖에 가까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자 이제 당신이 최선을 다해 공격을 할 때입니다/ 최악의 경우라 여겨질 때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오래된 김민기의 노래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