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전문기자리포트]준비안된 신문,준비된 발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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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왜 환란 (정책) 청문회를 열었는지 어리둥절하다.

경제위기의 원인과 그것을 치유하지 못한 정책적 과오, 그리고 부실경제가 어떤 과정을 거쳐 환란을 맞게 됐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경제청문회의 주목적이다.

그렇게 해야 '6.25 이후의 최대 국난' 속에 신음하는 국민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의 정책과 경제운용을 어떻게 해 다시는 이같은 경제위기의 재발을 막을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같은 생각으로 청문회를 지켜본 사람들의 심정은 한마디로 "이래 갖고서는 똑같은 일이 닥칠 경우 같은 위기를 맞겠다" 하는 것이다.

경제위기의 '정책적 과오' 규명이 당초 기대에 못미치기 때문이다.

청문회는 우선 ^정책적 과오보다 정책 추진과정의 잘못에 관심을 두었다.

위기의 원인이 우리의 잘못인지, 국외의 충격 때문인지, 재벌.은행.정부.정치권 등 개별부문의 경영방식의 잘못인지, 아니면 정부정책의 잘못.정책담당자의 잘못인지, 또 정책의 내용과 추진과정이 문제였는지, 그러면 앞으로의 정책과 그 추진체계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를 따져야 했다.

또 막상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과연 IMF 구제금융을 받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는지, 더 일찍 IMF체제로 갔어야 했는지 등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주지 못했다.

정책 추진에 관해 외환보유액의 고갈을 따지면 늘리려고 애썼다고 답하고, 환율 고평가를 추궁하면 환율 실세화에 애썼다고 했다.

기아사태 해결의 지지부진함을 지적하면 빨리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고 했다.

답답하기 그지 없다.

위기발발과 관련해 ▶위기인식과 대책의 안이함을 추궁했지만, 신문자가 "왜 위험한 징표가 많았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었느냐" 고 하면, 증인은 "위험은 알고 있었지만 단지 11월 같은 환란이 올 줄 몰랐다" 고 했고, "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았느냐" 고 하면 "수없는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느냐" 며 빠져나갔다.

그러다보니 ▶구조적 원인보다 단기적 대응의 미흡에 초점을 맞췄다.

기업의 과다한 부채와 부실, 이에 따른 금융부실, 노동시장을 포함한 경제의 총체적 경직성 등을 야기한 정책적 오류.해소책 미비 등에 대한 논의는 눈에 띄지 않았다.

위기관리체계에 관해서도, "위기대책반을 왜 두지 않았느냐" "위기상황인데도 재경부와 한은은 왜 서로 싸우며 국회에서 시간만 낭비했느냐" "위기상황을 왜 제때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느냐" "왜 IMF 지원요청에 2주일을 허비했느냐" 등 답이 뻔한 질문만 했다.

결국 신문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했다.

그저 " (무엇인지는 몰라도) 잘 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정도밖에 얻지 못했다. 그래서 '준비 안된 신문, 준비된 증언' 이라는 말이 나온다.

신문자에게는 국민을 대신해 울분을 퍼붓는 자리를, 증인으로 나선 '죄인' 들에게는 수없이 들어온 잘못에 대한 해명의 장 (場) 을 마련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을 하면 '그것 잘 물어 주었다' 는 식으로 청문회가 진행되다보니 '짜고 치는 고스톱' 이라는 일부의 힐난도 피할 수 없었다.

청문회가 이렇듯 실효를 거두지 못한 대부분의 부담은 청문회를 준비한 측이 져야 한다.

각자 집중 질문분야를 맡아 철저한 준비를 했어야 했다.

아마도 신문자들이 대통령이나 정권 차원의 잘못.경제운용체계의 혼란상 같은 '큰 잘못' 을 캐느라 바빠서 그랬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같은 내용의 수차례 언론에 보도된 신문내용이 반복됐고, 정책적 오류와 같은 '구체적 문제점' 에 대한 신문은 어투만 날카로웠을 뿐 증거나 논리로 증인의 변명을 압도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반쪽의 준비 안된 청문회' 라는 원초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래서 직접적인 피해자인 국민들의 울분과 청문회에 대한 무관심은 계속되는 것이다.

김정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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