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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의 나쁜 기억 ‘제왕적 국세청장’시대 끝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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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 06면

“백용호의 힘을 느꼈다. 이명박(MB) 대통령의 측근으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다.”

취임 한 달 백용호 국세청장의 ‘조용한 카리스마’

지난 14일 백용호(사진) 국세청장이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에서 국세청 개혁 방안을 발표한 다음 국세청 안에선 이런 얘기가 나왔다. 백 청장이 국세청의 울타리가 돼 주었기 때문이다. 백 청장이 개혁안을 내놓기 전까지 국세청 직원들은 떨었다. 청와대의 국세청 개혁팀(TF)이 강도 높은 개혁안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청와대 TF는 지방청 폐지, 일선 세무서 통폐합, 외부 감독위원회 설치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 조직을 대폭 축소하고, 감독 기능을 외부에 맡기는 등 강한 충격요법을 써야 국세청이 개혁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백 청장의 판단은 달랐다. 국세청을 너무 흔들면 일을 하기 어렵다고 봤다. 그래서 ▶지방청을 살리되 기능을 조정하고 ▶국세청 안에 민간위원 중심의 국세행정위원회를 신설하며 ▶감사관 등 국장급 3개 요직을 외부 인사로 채우기로 하는 등 조직에 변화를 주면서도 안정을 유지하는 길을 택했다.

“변하지 않으면 감당 못할 위기 직면”
백 청장은 세무관서장 회의에서 “외부에서 조직 개편을 포함한 개혁안이 검토된 걸로 아는데 그 실효성 여부를 떠나 그런 개혁안이 나온 것은 우리의 책임, 특히 관리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지적했다. “우리가 스스로 변하지 않는다면 국세청은 감당하기 어려운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지금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세청 관계자는 “백 청장이 조직을 위해 울타리 역할을 한 대신 직원들에겐 ‘의식의 철저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며 “직원들은 도덕성과 청렴성을 강화하고, 국민에 대한 서비스 정신을 제고하라는 주문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 청장은 공정거래위원장(2008년 3월∼2009년 6월)을 맡았을 때도 조직의 방풍막이 됐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대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 드라이브를 거는 등 반(反)기업적 성향을 보인 공정거래위(공정위)를 차관급 기구로 격하하거나 다른 경제부처와 통폐합하는 방안을 이명박 정부는 검토했다. 그러나 백 위원장은 반대했다. 그는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는 나라에서는 경제질서를 바로잡는 기능을 가진 공정위와 같은 기구를 축소한 사례가 없다”며 “조직을 약화하기보다 조직의 업무나 기능 가운데 잘못된 걸 시정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는 게 공정위 김준하 과장의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백 청장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는 건 공정위를 친(親)시장적 기구로 개혁하라는 지시를 성공적으로 완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측근이라고 하더라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중책을 맡기지 않는다”며 “대통령이 4대 권력기관 중 하나인 국세청을 백 청장에게 맡긴 건 공정위에서 보여준 그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는 “학자(이화여대 정책과학대학원 교수) 출신인 백 청장은 ‘낙하산’의 성공 모델”이라며 “이 대통령이 학자들을 많이 중용하는 데는 백 청장의 성공 사례도 영향을 미쳤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국세청에 대한 이 대통령 인상은 좋은 편이 아니다. 1998년 이후 4명의 국세청장 출신이 비리 혐의 등으로 구속됐고, 2명의 청장은 불명예 퇴진을 한 사실을 이 대통령이 잘 아는 데다 자기 자신도 국세청에 대해선 기분 나쁜 기억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임기를 마치고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을 준비하던 때인 2006년 가을 국세청은 이 대통령과 친인척의 재산을 뒤졌다. 부동산 투기와 명의신탁 등의 의혹이 있다는 이유로 뒷조사를 한 것이다. 이듬해 그 사실이 알려지자 이 대통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흥분했다.

그런 일을 겪은 이 대통령이 6월 21일 조세 행정 경험이 전혀 없던 백용호 공정위원장을 국세청장에 지명하고 다음 날 ‘국세 행정의 제대로 된 개혁’을 강조하자 국세청은 긴장했다. 당시 국세청 직원들 사이에선 “청장 자리를 5개월 동안 비워두면서 국세청에 기합을 준 이 대통령이 칼잡이를 보냈다. 우린 죽었다” 등의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백 청장이 취임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난 지금 그런 불안감은 많이 가신 상태다. 백 청장이 조직의 사기와 안정을 고려한 개혁안을 내놓은 데다 직원 친화적인 언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열한 직원들에게 “이러지 마라”
백 청장은 자신이 지닌 인사권을 대폭 이양했다. 본청엔 차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인사위원회를 설치해 인사 기준을 마련하도록 했으며, 지방청장에겐 4∼5급 직원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했다. 이는 ‘제왕적 국세청장’의 시대를 끝내고, 인사의 공정성·투명성·자율성을 높이겠다는 것이어서 박수를 받고 있다. 그런 백 청장에게 ‘인사권을 나눠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 아니냐’고 물었더니 “말보다 행동이 중요하다. 좋은 제도를 정착시키려면 실천을 잘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17일 서울 양평동의 국세청 전산실을 방문했다. 을지훈련이 시작된 이날 국세청의 심장인 전산실을 찾은 까닭은 과세 정보의 철저한 관리와 사이버 테러 예방 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가 다녀간 뒤 전산실의 한 여직원은 가까운 동료에게 이런 e-메일을 보냈다. ‘(백 청장이) 본인의 입장을 솔직하게 설명하고, 혼자의 힘으로 안 되니까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함께 협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하는 직원들도 있었다. 옛날처럼 나이가 든 분이 아니라서 그런지 권위적이지 않고 부드러운 것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많았다’.

백 청장은 전산실을 찾기 전 본청 구내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비서실에선 간부식당에 상을 차리도록 했지만 백 청장은 직원식당으로 갔다. 그리고 일반 직원들 사이에 앉아 주먹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눴다. 세무관서장 회의를 마친 14일에도 헤드 테이블에 마련된 청장과 고위 간부의 자리를 외면하고 일반 직원 옆에 불쑥 앉아 오찬을 했다. 동대문세무서를 순시했을 때 간부들이 도열해 있는 걸 보고서 “앞으론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곧바로 민원실로 들어가 직원들을 만났다. 당시 백 청장을 수행한 한 직원은 “청장이 서장실로 먼저 들어가서 업무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달한 다음 직원들을 격려하는 게 과거의 관행이었으나 백 청장이 깼다”며 “이는 작고 사소한 일이지만 직원들은 그런 모습에서 감동을 느낀다”고 말했다.

백 청장에게 ‘무슨 일에 가장 신경 쓰느냐’고 묻자 그는 “직원들과의 소통을 통해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라며 “소통을 잘해야 조직이 산다”고 답변했다.
백 청장은 지방청이나 세무서 순시 일정을 언론에 알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한다. 이벤트성으로 비치는 걸 꺼려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국민에게 필요한 정보는 자세히 알리되 자화자찬식 홍보는 하지 말라”는 말도 했다고 한 간부는 밝혔다. 공정위에서도 그랬다고 한다. 김준하 과장은 “식사할 때 헤드 테이블엔 앉지 않고 직원들 틈에 앉아 그들의 얘기를 듣는 걸 좋아하더니 국세청에서도 그렇게 하더라”라고 말했다.

초심 지키고 치밀해야 성공
백 청장에겐 ‘조용한 카리스마’라는 말이 따라다닌다고 한다. 김 과장은 “말이 많지 않고, 목소리도 크게 내지 않지만 할 일은 확실히 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실무적인 건 부위원장 등에게 맡기고 굵직하고 큰 것만 챙긴다”고도 했다. 김 과장은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대를 극복하고 대규모기업집단의 출자총액제한을 철폐한 것이 그 예”라며 “그걸 관철하기 위해 위원장이 수많은 국회의원을 만났다”고 했다.

공정위가 지난달 세계적인 IT 기업인 미국 퀄컴사에 대해 불공정 거래를 했다며 2600억원의 과징금을 물린 것도 백 청장의 작품이라고 김 과장은 밝혔다. “퀄컴에 대해선 2006년부터 조사를 시작했으나 퀄컴의 한국 시장 지배력이 워낙 큰 데다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사가 흐지부지된 상태였다. 그런 시점에 공정위를 맡은 백 청장이 ‘대형 다국적 기업이라고 해서 조사를 못 하면 안 된다. 조사에 속도를 내라’고 했으며 진척사항을 직접 챙겼다”는 것이다.

백 청장은 공정위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강성으로 알려진 공정위 노조가 그를 ‘자랑스러운 공정인’으로 뽑았을 정도다. 노조는 지난해 6월 백 청장이 직원의 업무재량권을 살려줬고, 복지도 향상시켰다며 감사장을 전달했다. 하지만 공정위에서의 성공이 국세청장의 성공을 담보하진 않는다. 백 청장이 개혁 방안을 내놓고, 직원의 의식 변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비리가 끊이지 않는 국세청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는 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최우석 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은 “직원 500명의 공정위와 2만 명이 있는 국세청은 다르다”며 “국세청의 경우 세무조사의 민감성이 크고, 외부의 입김도 작용하며, 과거에 머물러 있는 직원들도 많기 때문에 공정위원장 때보다 훨씬 치밀하고 정치(精緻)하게 조직을 관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김종상 전 부산지방국세청장은 “국세청장에 처음 부임했을 땐 의욕을 부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며 “초심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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