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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이끄는 '스타 작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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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달에 전시회를 마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조선 후기의 그림들 중에서 '기(氣)'와 '세(勢)'가 뚜렷한 작품을 따로 모은 전시였는데, 전시 기간 내내 기세좋게 밀려드는 관람객을 응대하느라 파김치가 됐었다. 전시회에는 스타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몰린다.

이번 출품작 중에서도 스타가 있었다. 정선이 그린 '박연폭포'와 이인상이 그린 '장백산도'가 그것이다. 많은 관객이 18세기 거장인 두 사람의 작품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관객이 머문 시간만 가지고 판정을 내리자면 정선의 우세승이었다. '세'가 펄펄 끓는 박연폭포 그림이 '기'가 고요히 스며든 장백산 그림보다 눈길을 더 끌었던 것이다. 긴장과 피로 속에서도 관객의 편애와 두둔을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것은 종일 전시장을 지켜 내가 얻어내는 위안이다.

큰 전시 뒤에는 작은 여진이 있다. 전시회를 본 대구의 미술사학자 한 분이 편지를 보내 왔다. '박연폭포를 찾아왔다가 장백산에서 배우고 간다'고 적은 그 분은 '기교적 아름다움을 넘어 심의(心意)의 작법으로 그림을 그려낸 이는 이인상이 최초가 아닐까'라고 토로했다. 편지를 읽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장에서 박연폭포를 본 사람들은 대개 탄성을 질렀다. 하지만 장백산을 보고 입을 뗀 사람은 드물었다. 나는 그 차이를 눈여겨봤다. 편지에 적힌 글은 전시 현장에서의 반응에 견주면 '소수 의견'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법정에서나 미술사에서나 소수의견이 갖는 무게는 가볍지 않다.

이인상의 '장백산도'는 백두산을 그린 그림이다. 가로 1m가 좀 넘는 수묵화다. 오른쪽 근경에는 듬성한 나무들 사이로 띠집 한 채가 보이는 언덕이 있고 왼쪽 원경에는 봉우리가 줄지어 선 아스라한 산들이 있다. 구도는 싱거울 정도로 단순하다. 근경과 원경 사이에 천지연이 있는데 화가는 이를 온통 여백으로 처리해 휑한 느낌을 준다. 그림을 그려달라고 청한 친구가 여백이 너무 많은 걸 보고 '자네 너무 게으른 게 아닌가'라고 물어 웃었다는 얘기가 그림 한 쪽에 적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백산도'가 이인상 그림의 본보기로 꼽히는 이유가 있다. 먹 쓰기를 금가루처럼 아꼈다는 옛말 그대로 극도로 절제한 붓질에는 억지와 과장이 없으며, 허허롭고 적요한 산수를 깊은 명상의 공간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문인화의 전형이 이런 것일 터다.

내가 '장백산도'를 처음 본 것은 10여 년 전이다. 그때 이 그림은 허리가 잘린 채 따로 미술시장에서 떠돌고 있었다. 두 점으로 쳐서 값을 받으려고 한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 수소문한 끝에 내가 수습해 지금의 작품으로 복원했다. 사연이 많으면 안 보이던 것도 보이는 것일까. 이 그림에서 나는 '주역'의 겸괘(謙卦)를 떠올리기도 한다. '시경'의 시 300편을 '사무사(思無邪)' 한마디로 압축하듯 '주역'의 전편은 '겸손(謙遜)' 하나로 요약해도 좋다. '겸'은 높고 큰 산이 낮은 땅 아래 내려와 있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시경의 표현으론 '비단 옷을 속에 입고 삼베 옷을 겉에 걸친다(衣錦尙絅)'와 통한다. 노자의 입을 빌리자면 '빛남을 누르고 티끌과 함께 한다(和光同塵)'는 경지다. '장백산도'에는 치장하지 않는 포의처사의 담백함이 있다. 재능을 뽐내지 않는 은일거사의 몸가짐도 엿보인다.

이인상은 영조 때 현감 벼슬을 끝으로 은거했다. 실제로 그는 하루에 주역 한 괘를 보는데 "아침에 열 번 읽고, 낮에 열 번 읽고, 등불을 켜고 열 번 읽는다"고 말했다. 또 그가 아내와의 사별을 슬퍼하며 지은 글에는 '앞으로 말수를 줄이고 병든 몸을 추스르며 세속의 교제를 끊고 번다한 세상사를 정리하려 하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인상의 문기는 이러한 심회와 겸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어쩌다 보니 내가 벌인 일을 가지고 글을 썼다. 겸손하기가 이렇게 어렵다.

우찬규 학고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