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먼저 마음 열어 진정한 한·일 동반시대 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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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늘로 8·15 광복 64주년이다. 일제 35년 강점 통치가 끝나던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들이 지금은 예순을 훌쩍 넘긴 반백의 노인들이 되었다. 이 아침을 맞는 그들의 감회는 남다를 것이다. 해방 이후 우리 역사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적의 역사였다. 분단의 아픔과 전쟁의 참화를 딛고 세계에서 가장 헐벗고 굶주리던 나라를 세계 15위의 경제강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쓰레기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게 낫다는 멸시를 뒤로 하고 보란 듯이 민주화에도 성공했다.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모범국가가 됐다. 교육 수준과 문화적 역동성은 또 어떤가. 이만하면 불행했던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 열등감, 원한을 털어내고 마음으로부터 화해의 손길을 내밀 때가 됐다고 본다.

세상의 빠른 변화와 급변하는 국제질서는 과거에 발목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고 있다. 세계의 중심은 아시아로 빠르게 옮겨오고 있다. 21세기는 아시아, 보다 정확히는 한·중·일이 중심이 된 동아시아의 시대가 된다는 예측은 상식에 속한다. 동북아 3국 간 평화와 협력은 통일을 포함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중·일 두 축 사이에서 한국이 톱니바퀴가 되는 동아시아 공동체 구조가 가장 바람직하다. 과거에 얽매여서는 한국이 걸맞은 역할을 하기 어렵다.

일본도 변하고 있다. 8·30 총선을 계기로 자민당이 장기 집권하는 ‘55년 체제’가 종식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 경우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는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민주당 대표는 아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특히 강조하고 있다. 한·중과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논란을 근본적으로 잠재우기 위해 종교와 무관한 별도의 국립추모시설을 건립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먼저 손을 내민다고 과거를 잊자는 얘기가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규명해 후세에게 제대로 가르치는 노력은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다만 과거와 관련한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냄비 끓듯 하는 버릇은 이제 그만두자는 얘기다. 우리가 먼저 성숙한 태도를 보이는데도 일본이 과거처럼 우리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소아병적 행태를 계속할 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평화롭고 번영된 동북아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한·중·일 3국 현 세대 공동의 꿈이어야 한다. 동북아에 패권주의가 부활할 때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이 한반도임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지난 64년간 우리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우리부터 마음의 문을 열자.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중국, 일본과 잘 지낼 때 우리의 역할 공간은 커질 수 있다. 일본의 전후 체제가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넓은 마음으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좋은 기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