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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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6장 두 행상

한씨네 행중이 찾아갔던 예천장은 윤씨네가 찾았던 의성장에 비하면 장마당의 규모에서나 장꾼들의 흥청거림에 있어서나 뒤지는 장사였다.

게다가 예천에서는 고추장과 반찬거리를 파는 저자가 분리되어 있었다.

저자거리는 동본동의 상설시장 변두리에서 열렸고, 고추와 마늘시장은 남본동 구시장에서 열렸다.

가근방에 있는 장돌림들은 예천장을 비롯해서 점촌장이나 풍산장 그리고 용궁장과 영주장을 거쳐 함창장으로 가거나 지보장을 거쳐 예천에서 다시 만나는 상로 (商路) 를 선택하였다.

예천의 청정고추도 영양이나 청송고추의 성가를 지니고 있어서 아침나절에 서는 고추장에서는 장꾼들이 제법 흥청거렸기 때문에 철규네는 고추장이 서는 예천농협 앞에다가 좌판을 벌였다.

좌판은 승희와 나란하게 두었기 때문에 변씨는 아침부터 근처의 다방을 순례한 다음 이불장수 좌판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기판을 기웃거렸다가 구렁이 알같이 귀한 돈 1만원을 날리고 말았다.

상대는 어수룩해 보이는 이불장수와 나이가 스물한두 살로 보이는 신출내기 행상이었다.

요사이 와서 부쩍 눈에 띄기 시작한 신출내기들을 장마당에서는 '아이엠에프' 로 불렀다.

아이엠에프의 삭풍에 밀려 장마당으로 진출한 풋내기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행색만 보아도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첫째 그들은 십중팔구 태호처럼 모자를 쓰고 의복이 말쑥했다.

두번째는 부부가 같이 장삿길로 나선 축들이 많았다.

세번째는 장마당에 오래 끌고다녀도 부패하거나 냄새가 나지 않는 의복류나 가방 따위를 팔고 있었다.

네번째는 아득바득 호객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섯번째는 하루 종일 매우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출내기와 맞붙어서 둔 내리 세 판의 장기에서 곱다시 패하고 육천원을 고스란히 빼앗긴 것이었다.

분통 터지고 심술이 난 변씨는 물론 초면인 녀석에게 볼멘소리로 물었다.

"자넨 장마당에 나와서 도대체 뭘 팔고 다니나?" "저 말입니까?" "아니면, 내 돈 6천원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빼먹은 놈이 자네 말고 또 있다는 얘긴가?" "저는 동남아 수출용 아이디어 상품 팔고 있습니다. " "아이디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상품인데?" 녀석은 전혀 주저하는 눈치도 없이 반죽좋게 대답했다.

"저 플라스틱 깔때기 팔고 있습니다. 동남아 수출용입니다. " 기가 찼던 변씨는 다시 물었다.

"깔때기를 팔어? 깔때기는 조선시대부터 팔던 건데 무슨놈의 우라질 아이디어 상품이여?" 그렇게 윽박질렀는데도 녀석은 눈 한번 질끔하는 법이 없이 대거리였다.

"아닙니다 아저씨, 제가 팔고 있는 깔때기는 깔때기 중간에 여과막이 설치돼 있거든요. " "여과막이란 건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여과막이란 말을 못 알아들으시는군요. 찌꺼기 걸러 주는 망사장치가 있다는 얘기죠. "

"요사이 같은 아야야시대에 섬거적을 뜯어서 국을 끓였다 하더라도 감지덕지할 판국인데. 어떤 호광스런 놈들이 걸러 가며 먹을 게 많다고 아이디어 깔때기를 팔고 다니냐?"

"아저씨 그런 말씀 마세요. 깔때기가 안 팔리면 장기 두어서 벌충을 하는데 무슨 말씀 그렇게 하세요?" "야 이녀석 봐라. 구찌빤찌가 보통 아니네, 넌 깔때기 팔지 않고 장마당 돌아다니며 남의 부아 채우는 사람으로 나서도 입에 풀칠은 하겠다.

그 방면으로 나서는 게 어떻겠나?" "아저씨가 알선해 주실래요?" 6천원 잃고 돌아설 걸 잘못했다는 후회가 변씨의 가슴을 쳤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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