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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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제6장 두 행상

그들 두 위인은 승희를 미행하는 일에 푹 빠져 골똘해야할 장사는 애당초 뒷전이었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들에게 갑자기 예천장을 포기하고 의성으로 가자고 한다면 펄쩍 뛸 것은 뻔한 일이었다.

봉환의 느닷없는 돌출행동으로 진퇴양난이 된 윤종갑은 일단 배완호와 조창

범을 설득해보기로 하였다.

그 자신도 봉환의 주장은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견했던 대로 두 사람은 오히려 봉환이가 쓸개가 뒤집힌 위인이라고 욕설부터 퍼부어댔다.

더욱이나 조창범은 귀여겨 듣지도 않았다.

승희와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승희 뒤를 쫓아 다녀야 할 처지에 있었다.

"승희씨하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가다가 똥바가지를 뒤집어 쓴다 할지라도 예천장까지 뒤따라 가야 합니더. 두 말하면 잔소립니더. 내 걱정말고 당신들은 의성장으로 가소. " "패가망신할 일이라도 있나? 그 여자가 예천장에서 숨 거두고 죽을까 겁나서 그래?" "천지개벽이 된다 캐도 나는 꿈쩍도 안할끼라요. " "완호 자네도 마찬가진가?" 배완호의 태도 역시 조창범 못지 않게 단호했다.

뜻하지 않게 자중지란을 겪게 된 윤종갑은 그러나 일단은 두 패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 사람을 설복시켜 행동통일을 가지기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기 때문이었다.

안동에서 의성은 훤하게 뚫린 4차선 도로를 따라 한티재와 재랫재를 넘어 30분이면 당도하는 곳이었다.

장마당이 자리잡은 도동 일대는 무싯날에도 마늘장이 설 만큼 의성장은 마늘장 그 자체라 해서 무리가 없었다.

이곳의 마늘장은 올마늘이 출시되는 그해 5월부터 형성되기 시작해서 10월까지였다.

그러나 10월에 들어서면서 마늘거래는 시들해지는 편이었다.

이곳에서는 풋때라고 부르는 6월의 성수기에는 그 넓은 장마당에 쌓아둔 주대마늘 (줄기를 자르지 않은 것) 더미들로 맞은 편에 있는 장옥의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의성의 마늘장은 장이라기보다 마늘 중계지라는 것이 걸맞았다.

그러나 의성마늘의 특징인 이들 주대치들도 지난날처럼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젊은 주부들이 줄기를 다듬어야 하는 번거로움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 때문에 망사포대에 넣은 통마늘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마늘일 경우 눈썰미가 없으면 남해산이나 수입품인 스페인산을 의성마늘로 잘못 알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장마당에 나가서 귀동냥만 해도 남해산은 껍질이 유난히 희고, 스페인산은 마늘 쪽이 열개가 넘는다는 것을 터득할 수 있었다.

의성마늘의 특징은, 껍질이 붉은 자색을 띠는데다가 덧접 (마늘껍질) 이 얇고 마늘 쪽의 끝부분이 다른 지방산보다 뾰족하기 때문에 박봉환의 눈썰미로도 의성마늘의 특징을 익히 가름할 수 있었다.

의성장에 있는 마늘상회에서는 중상품 한 접 (백개) 을 1만6천원에 소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동 (백접) 이상의 도매로 구입할 경우는 흥정에 따라 훨씬 싼 값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교통이 편리해지기 시작하면서 의성장은 마늘 중계지로서의 역할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옛날 같았으면 의성장으로 모인 마늘들이 인근의 안동이나 대구를 중계지로 삼아 대도시로 나가는 것이었으나 요즘 들어서는 의성에서 곧장 서울이나 타도시로 운송되었다.

1t 트럭에 마늘을 실을 경우, 보통 1백50접에서 2백접까지 실을 수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서울의 가락시장으로 운송하기만 하면 백만원 내외의 시세차익을 겨냥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남해산이나 스페인산이란 의심만 받지 않으면, 원매자 (願買者) 들을 골라 잡을 수도 있었다.

통마늘일 경우 의성에서는 10㎏들이 한포대에 4만6천원 내외에 팔리고 있지만 서울의 가락시장에서는 7만원 이상을 호가하고 있었다.

박봉환이가 노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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