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한국서 바라본 '제3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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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외환위기로 시작된 우리 경제의 위기도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우리 시대 제일의 경제철학으로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이 시장경제를 실현할 것인가 하는 과제에 일로매진해 왔다.

시장자유화.탈규제.민영화는 이러한 시장중심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 지금 미국과 유럽의 선진 경제국가에서는 시장주의의 과도함에 대한 반작용이 현저하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달 노벨상위원회는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와 인도의 아마르티아 센에게 각각 문학상과 경제학상을 수여했다.

소외와 빈곤에 대한 휴머니즘적 문제의식을 다시 일깨웠던 것이 그들의 중심주제다.

특히 센은 빈곤과 분배정책을 통해 사회적 기회를 늘리는 것이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노벨상위원회의 선정 정신과 올해 가을에 일어나고 있는 정치의 변화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신중간' '제3의 길' '고용을 위한 동맹' 등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의 정치노선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조류의 핵심은 자유시장 만능주의도 아니고 지난날의 사회복지의 전면적 회복을 중심으로 해 사회민주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것도 아니다.

시장주의와 사회복지의 중간을 의미하는 완화된 자유시장, 완화된 사회복지가 그 본질이다.

시장주의의 과도함에 대한 거부, 그러나 자유시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힘을 통한 고용 창출, 기본적 사회보장의 유지, 중앙은행의 무제한적 자율성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핵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장의 효율성만이 아닌 정치의 방법을 통한 고용정책.사회정책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효율성과 사회적 정의의 균형을 지향하는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클린턴의 성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신보수주의 노선을 강력하게 추진했던 깅그리치가 이끄는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사실상 패배한 것은 이러한 변화를 나타내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현재 국제통화기금 (IMF)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통계는, 유럽에서도 그러했던 것과 같이 실업의 급증과 소득감소로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음을 어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적 경제위기를 맞이해 고용문제나 사회복지 문제 모두에 있어 효율적인 대책과 방안을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실업에 대한 적응력이 절대 부족하고 사회안전망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실업을 감내하면서 우리 사회가 통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심각히 고민해야만 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개인들의 이익추구를 넘어 사회를 통합할 수 있도록 묶어주는 사회적 규범이나 가치관이 힘을 갖는, 잘 통합된 사회에 뿌리내릴 때 경제는 번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핵심이론이기도 하다.실업대책이 실기 (失機) 해 사회통합의 해체라는 사회적 위기가 증폭될 때, 이는 경제성장은 그만두고라도 민주주의의 기반을 침식하는 효과를 갖는다.

더욱이 오늘날 경제의 흐름은 어느 한 나라 정부의 힘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세계화되고 개방화됐다.

문제는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과, 세계경제가 호황국면으로 전환했을 때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기의 시점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하는 노력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노사정 (勞使政) 경제주체들간의 사회적 협력을 통해 경제체제를 더 개방적이고 경쟁력 있는 것으로 개혁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소국 (小國) 개방경제체제를 갖고 있는 우리가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의 권위주의적 발전모델을 고집해서는 새로운 경제도약을 기대할 수 없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초기 이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운영의 철학으로 천명해 왔던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말은 명시적으로 잘 정의되지는 않았지만 자주 '민주적 시장경제' 라는 말과 혼용 (混用) 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말을 잘 듣기 어렵다.

필자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말에 대해 이 정부가 출범초기 화두로 던졌지만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어떤 보석과 같은 것으로 늘 생각해 왔다.

시장의 과도함에 대한 하나의 반성과 정책적 전환이 세계적 수준에서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말에 대해, 이론과 정책의 틀로서 그 가치를 더욱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최장집(고려대교수.정책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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