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삶의 향기

참깨꽃 가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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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길둥근 능선을 따라 걷다 산 아래로 내려오면 여기저기 텃밭이 있다. 텃밭 양편에는 해바라기가 피었고, 보라색 가지꽃이 피었고, 코스모스가 피었고, 호박꽃이 피었고, 하얀 참깨꽃이 피었다. 언제 봐도 삶에 활력을 주는 게 꽃이다. 청나라 후기 문인 주석수는 “나비를 빼어나게 하고, 벌을 우아하게 만들며, 이슬을 요염하게 하고, 달을 따스하게 해 주니 꽃은 조화를 알선해 준다”라고 쓰기도 했다.

산책길에는 내 가족이 ‘참깨꽃 가게’라고 부르는 집이 있다. 보름 전에는 그 집을 ‘오이꽃 가게’라고 불렀다. 허름한 비닐하우스 집인데, 노부부가 산다. 노부부가 직접 물 주고 거름 줘서 기르고 가꾼 채소들을 내놓고 팔고 있다. 보름 전에는 오이를 주로 내놓고 팔았기 때문에 내 가족은 그 집을 ‘오이꽃 가게’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즘은 오이가 끝물이고 꽃도 거의 지고 말았다. 대신 하얀 참깨꽃이 피는 때여서 그 집을 ‘참깨꽃 가게’라고 바꿔 부르고 있다. 호박과 호박잎, 고추, 부추, 가지, 깻잎, 고구마 순 등속을 내놓고 팔고 있다. 작게 묶거나 무더기로 쌓아 놓았는데 대개 값은 1000원 이쪽저쪽이다.

할머니가 돈을 받으려고 앉아 있을 때도 있지만 없을 때가 더 많다. 할머니가 없으면 사람들은 값을 쳐 대바구니에 넣고 간다. 하루에 파는 양이 많지도 않다. 그것은 그 부부가 짓는 농사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 수확한 만큼만 팔고, 팔 물건이 떨어지면 그만 판다. 안 팔리면 시들시들해져 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밭에 여러 종류의 채소를 나눠 가꾸고 있다. 할아버지의 기력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낮에나 가끔 보게 되는데 낮술을 한잔하시거나 부채질을 하면서 평상 겸 좌판에 앉아 계시거나 장기를 두신다.

이 ‘참깨꽃 가게’는 두어 철 전에 거둬들인 것도 판다. 오이장아찌, 담근 깻잎, 무말랭이 무친 것 등을 판다. 내 가족에게 인기가 있는 것은 무말랭이를 양념에 무친 것인데 시골 어머니가 해 주신 음식 맛이 나기 때문이다. 주름진 손으로 무치다가 손가락으로 집어 올려 맛을 보며 간을 맞췄을 그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아무튼 ‘참깨꽃 가게’를 방문할 때마다 행복하다. 우선 사고파는 일이 즐겁다. 사는 이도 파는 이도 욕심 없이 마음이 느슨해서 좋다. 오늘 먹을 만큼만 사고판다. 게다가 거저 얹어 주는 덤도 많다.

그런데 엊그제 ‘참깨꽃 가게’가 문을 닫았다. 비닐하우스 집으로 들어가는 곳에 그물을 쳐 놓았다. 여름휴가를 가신 것 같았다. 그 대신 새로운 가게가 하나 생겼다. 못 보던 분이 ‘참깨꽃 가게’ 옆에 자리를 턱 잡았다. ‘참깨꽃 가게’ 노부부가 돌아오기 전까지만 장사를 하겠노라며 수줍게 웃었다. 속태(俗態) 없이 웃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 한쪽이 또 행복해졌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