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인터뷰]'상록수'등 국민가요로 부활 김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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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그동안 신문지상에 실린 김민기의 얼굴을 보면 고개가 약간 앞으로 숙여져 있다.

그는 바깥을 직시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인터뷰에 앞서 단 한장의 컷을 건지기 위한 사진기자의 집요한 촬영공세가 시작됐다.

"좀 웃으시죠. " 얼굴에 쑥스러운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 소리없이 웃었다.

이제는 그 이름 앞에 전설이란 수사가 과장이 아닐 김민기는 일산의 호수마을에 산다.

호수마을이 딱히 그 이름의 이미지에 걸맞은 마을인가는 검토사항이지만 '김민기와 호수마을' 하고 되내어보면 관념의 그림이 그럴 듯하다.

"저도 '아침이슬' 을 한 백번은 불렀을 텐데 그 노래를 들으면 징그럽지 않습니까. " 바보같은 물음에 바보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 생각 없어요. " 그가 근근이 꾸려가는 대학로의 소극장 '학전 그린' 위층에서 그는 맥주를 자작하며 속삭이듯 얘기했다.

만난사람=이헌익 문화부장

-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상록수' 가 국민응원가처럼 불리고 있다.

탄압받던 저항가요가 이렇게 쓰이다니 시대와 시대를 관통하는 노래의 웅변이 새삼스럽다.

"내 노래의 팔자가 그런 모양이다.

'상록수' 는 77년 부평의 봉제공장 다닐 때 만들었다.

동료들이 늦게 합동결혼식을 올리는 데 돈도 없고 해서 축가로 부조한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의 처지를 생각하자는 노래의 뜻이 세월이 흘러도 왜곡되지 않고 쓰이는 게 반갑고 고맙다. "]

- 만든 노래들마다 정말 팔자처럼 '상처투성이 영광들' 이다.

그 노래들로 돈을 벌 마음이 없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동가요로 애용한 걸 생각하면 김민기의 노래는 김민기의 것이 아닌 우리들의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노래는 결국 그것을 향수하는 사람들의 것이다.

광주항쟁 때 내 노래 '늙은 군인의 노래' 에서 시민들은 '군인' 을 '투사' 로 개사해 부르고, 군인들은 '군인' 그대로 부르며 동시에 운동가로 썼다고 한다.

이 아이러니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유홍준 교수의 '북한답사기' 를 보니 북한 접대원이 '아침이슬' 을 부르는데 '서러움 모두 버리고' 를 '두려움 모두' 로 바꿔 불렀다고 했다.

SBS에서 심장병어린이돕기 행사를 하면서 내 노래 '날개만 있다면' 을 쓰던데 그 때는 우리나라에 이렇게 노래가 없나 하는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향수하는 사람들의 뜻이 바르다면 그걸로 족하다. "

- 노래를 만들 때 그렇게 쓰이리라고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들었다.

왜 그 노래들이 시대적, 전투적 도구로 쓰였다고 생각하나.

"운동을 염두에 두고 만든 노래는 하나도 없다.

나는 주변을 바라보며 내 마음의 슬픔 혹은 젊은이의 보편적 슬픔을 표현했다.

'친구' 는 고3때 같이 동해안에 갔다가 익사한 친구를 그리워하며 지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 는 군대시절 만들었다.

'아침이슬' 도 아침동산의 풍경을 마음에 비춰 묘사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시대적 의미로 쓰이더라. 아마도 내 노래에 우리의 풍경을 담은 '스토리' 가 있으니 수용자들이 시대상황에 따라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내 노래가 그들에게 공명돼 그들을 위로했다면 다만 영광일 뿐이다. "

- 노래 특히 포크계열의 서정성이 운동의 도구로 쓰이면 비장감을 증폭시킨다.

'스토리' 까지 있는 김민기의 노래가 그랬다.

저항가수라는 별칭은 타인이 붙여준 셈인데 동의하나. "저항가수라는 표현은 맞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를 미화한다.

과분하다.

내 노래는 보편적 정서, 슬픔으로 사람들과 공명하고픈 것이다.

그것은 내가 나를 치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80년대 학생운동권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지식인적 나약함, 개인적 상념' 이 가득하다는 것이었다.

동의할 수 없었다.

내 노래에서 비장감을 느꼈다면 그건 70년대식 정서와의 조응이었을 것 같다. 80년대는 삭막했다. "

- 어쨌든 김민기 노래의 운동성은 전설적이다.

직접 행동을 안했더라도 운동의 중심에는 노래에 의한 김민기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

여기저기 연행돼 고생할 때는 직접 운동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나.

"경찰.검찰.보안사.안기부 안가본 데가 없다.

81년 전방지역 민통선 안에서 농사지을 때 또 갔는데, '메아리' 라는 노래집을 보여주며 작자미상의 '빨치산의 노래' 도 내가 지은 것이라고 만들었더라. 어이가 없어 오히려 담담했다.

'아침이슬' 가사중에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를 묘지는 유신시대를 뜻하고 태양은 김일성이라고 우겼다.

유신은 72년에 시작되고 이 노래는 68년에 만들었는데 내가 무슨 시간을 앞서 갔냐고 했더니 말문을 닫더라. 심정적 동조는 했더라도 집단적 운동은 내성적인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 "

서울대 미대 69학번인 김민기는 군에서 제대한 후 앞서 말했듯 부평의 공장에서 일했고, 80년대에는 민통선 안에서 농사를 짓다 지금의 익산인 이리로 내려가 약 4년간 본격적으로 논농사를 지었다.

그것은 이른바 '위장취업자' 나 '위장농부' 가 아니었다.

순수한 노동자.농부로의 변신이었다.

70년대말 이애주.김영동.임진택 등과 마당극에 참여해 대본을 쓰고, 노래굿 '공장의 불빛' 에 참여하다 우리정서를 더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귀농했다.

이리 시절 어느날 논에 가득 찬 물을 빼기 위해 물꼬를 트다가 뭔가를 깨달았다.

내가 이 넓은 논의 벼를 자라게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물꼬를 막은 한 삽의 흙을 뜨는 것뿐이라는 것이었다.

그 때 그는 태양을 다시 보고 논에 가득 찬 우주적 질서를 느꼈다고 했다.

주위를 보니 아무도 없어 논둑에 무릎을 꿇고 빌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귀경했다.

무얼 빌었느냐고 물으니 그냥 웃음으로 답했다.

- 노래와 통기타는 언제부터 가까이 했나.

"고1때 누나가 통기타를 사줬다.

그때까지는 노래의 수요자가 작곡가 이봉조 같은 분으로부터 노래를 그냥 공급받는 구조였다.

그런데 통기타는 수요자에게 개인화기를 지급한 것 같은 노래환경의 변화를 가져왔다.

고전적인 트로트와 서양의 팝송이 혼재하던 시기에 통기타는 노래에 있어 제3의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무기였다. "

- 초기 노래에는 미국의 '저항가수' 보브 딜런 풍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물론 보브 딜런을 좋아했다.

단발적인 사랑가 가사가 주를 이루는 속에서 모던 포크는 구상화처럼 느껴졌다. 가사에 인물과 풍경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영향과 함께 나아가다 내 노래의 그 무엇이 성격지워지지 않았나 싶다."

- 청소년들 사이에 랩이나 댄스음악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이게 날 것 그대로의 외래품이라 문제가 있는 듯하다.

다양한 노래 환경을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새로운 장르는 새로운 환경의 산물이다.

지금의 신세대는 랩과 동일어다.

우리 시절의 포크도 그랬지 않았는가.

랩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획일주의고 어른들이 하드웨어 (매스컴 등) 를 어떻게 운용하는가가 중요하다.

취향에 따라 선택을 유도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어른들의 획일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

- 90년대 들어 뮤지컬에 전념하고 있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음악은 잡다한 장르가 있지만 그 나름대로 영역이 있다.

그러나 보통의 가요는 3분짜리 (노래의 길이) 문화다.

2절짜리 노래를 8절, 16절로 만들어 봐도 3분짜리 원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무대 공연의 한 집합체인 뮤지컬에 손을 댔고 지금은 그것만 생각한다. "

- 수지는 맞는가.

"차츰 좋아질 것이다.

소작으로 농사지을 때 추수하고 계산해 보니 한달 수입이 3만원 정도 됐다.

품앗이로 뛰어다니다 보니 그 3만원조차 쓸 시간이 없었다.

그건 고생이 아니었고 풍요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마찬가지다. "

<김민기는…>

▶51년 전북 익산생

▶경기중.고 거쳐 69년 서울대 회화과

▶대학 시절 '도비두 (도깨비 두마리)' 듀오

▶70년 양희은 통해 '아침이슬' 발표

▶74~77년 군.공장생활 '상록수' 지음

▶78년 '늙은 군인의 노래' 등 수록 '거칠은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 제작

▶80년 농사 시작

▶85년 연극기획자 이미영과 결혼, 종화.소윤 두아들 둠

▶88년 금지곡 모두 해금

▶91년 소극장 '학전' 개관 (학전 블루)

▶9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 제작

▶96년 '학전 그린' 개관^98년 뮤지컬 '의형제'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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