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판사 대법관 제청 "법원, 금녀의 벽 무너졌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 초임 판사 중 여성의 비율이 50%에 육박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수년 내 법관의 남녀 비율이 같아지겠다는 성급한 진단도 나오고 있다. 사진은 지난 2월 있었던 예비판사 임용식 모습. 희게 처리된 부분은 남자 법관들이 선 자리. [중앙포토]

"이제는 강력사건을 담당하는 형사합의부에도 배치되고 서울에서 먼 지방으로도 발령이 납니다. 여판사에 대한 일종의 배려가 싹 없어진 거지요."

"산전후 휴가를 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남자판사들이 황당해했어요. 석달씩이나 쉬냐는 거예요. 요즘엔 임신한 여판사들이 많아지면서 이전보다 모성보호 문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아요."

약 20년 경력의 어느 여자 부장판사와 5년 경력의 여판사는 최근 여성법관이 급증하면서 생긴 변화를 각각 이렇게 설명했다. 김영란 대전고법 부장판사가 사법 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법관으로 제청되면서 법원의 여성파워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치솟는 여판사 비율=최근 2년 동안 새로 임용된 여판사의 비율은 전체의 절반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2003년의 경우 신규 임용자 110명 중 여성은 전체의 49%인 54명. 올해는 전체 115명 중 51명(44.3%)이 여성이었다. 이는 불과 4년 전인 2000년의 16명(9.6%)과 비교해도 수적으로는 세배, 비율상으로는 네배가 넘는 수준이다.

전체 여성 법관 수는 2004년 7월 현재 276명으로 이는 전체 법관 2099명 중 13.1%에 해당한다. 서울지법의 한 남자판사는 "급증하는 여성 법관이 있기 때문에 최초의 여성 대법관도 탄생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일반적인 추세를 감안해도 법원의 여성파워는 경계심을 느낄 만큼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 막 임용된 경력 1~2년의 예비판사 105명을 제외하면 여판사의 비율은 8%대로 떨어진다. 경력 15년 이상의 중진급은 10여명에 불과한 수준. 파워 면에서 아직도 목소리를 내기에는 역부족이란 얘기다.

법원에서 승진의 병목지대로 여겨지는 고법의 부장판사로는 대법관 제청을 받은 김 부장판사 외에 전수안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선희 사법연수원 교수 등 7명의 지법 부장판사가 있으며 다수(143명)가 지방법원 판사로 활약하고 있다.

◆지각변동 예고하는 여성 법관의 파워=서울지법의 한 중견 여판사는 "여성 법관은 아니지만 대법관 예우를 받는 전효숙 헌법재판관이 지난해 최초의 여성재판관으로 임명된 데다 올 들어 최초의 여성 지방법원장 탄생과 이번 여성 대법관 제청으로 법원에 더 이상 금녀의 벽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 후배들이 늘어나면서 어느 때보다 활기를 느낀다"며 "선배 세대들이 남성 위주의 조직에서 조심스레 끼어들기를 했다면 젊은 세대는 임신.출산과 관련된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다"고 달라진 세태를 전했다.

이같은 변화는 판결에 어떤 영향을 줄까?

한 여판사는 "여성이라 해서 여성에게 우호적인 판결을 내리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여성의 입장을 잘 이해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실제로 호주제 폐지 및 여성을 문중의 종중원으로 인정하는 소송과 관련해 여판사들이 사석에서 법원의 판결 및 남자 판사들과 다른 의견을 개진하며 토론했다는 후문이다.

여성계나 법학계의 기대도 크다.

서울대 법대 양현아(법여성학)교수는 "성폭력 사건 등을 다룰 때 여성이 유혹을 했다고 본다든지 남성의 관점이 관철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며 "성 관련 사건이나 이혼 문제, 재산분할 소송 등에서 균형 잡힌 판결을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성법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여판사는 "개인적으로 성차별을 겪지 않은 데다 이제까지는 극소수여서 목소리를 낼 만한 파워가 없었다"며 "최근 들어 여성 법관이 사회 문제에 관심을 넓혀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4~5년 전부터 서울고등법원 여판사를 중심으로 '여성관계법연구회'가, 사법연수원 내에 여성주의 서클이 만들어져 여성 관련법에 대한 세미나 등을 하고 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전진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