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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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정민을 데리고 제1부두 쪽의 해안도로로 나선 승희는 저녁으로 무얼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정민은 별로 주저하는 법도 없이 일식을 먹고 싶다고 대답했다.

의외의 선택에 의아했던 것은 승희였다.

떡볶이라든지 자장면이나 튀김음식 정도일 것이라는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민의 선택은 승희의 고정관념 따위를 깨려는 영악한 계산이 깔려 있었거나 또래의 계집아이가 가져볼 만한 알량한 허세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바닷가 일식집으로 데려갔으나 식단을 선택하는 일을 승희에게 미뤘고, 식탁에 올려진 횟감을 맛있게 먹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음식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부두 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거나, 아니면 승희를 오래도록 빤히 쳐다보아서 무안하도록 만들었다.

그 시선에서는 승희에 대한 호기심과 희미한 반감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품위를 유지하려는 의지는 갖고 있어서 제법 의연하게 굴었다.

승희도 정민이가 아버지를 찾아 주문진까지 달려온 속사정에 대해선 관심 없는 것처럼 덤덤하게 행동했다. 언뜻 보아도 정민은 똑똑하고 예민한 아이 같았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콧날은 당돌하리만치 오똑했고, 작은 안경 속에 갇혀 있는 두 눈으로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기 시작하면 좀처럼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물론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들어 왔던 철규의 말과 승희 스스로의 상상력 따위를 조합해 보면, 정민은 자기 어머니를 쏙 빼 닮은 게 틀림없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먹지도 않을 횟감을 젓가락으로 헤적거리면서 시선은 사뭇 바다 쪽으로 두고 있던 정민이가 물었다.

"저기 부두에 정박한 어선들 중에 꽁치잡이 어선들도 있겠네요?" "응. 있겠지만 주문진 부두에서 볼 수 있는 건 대개 오징어 채낚기 어선들이지. " "꽁치잡이 어선 있으면 구경하고 싶어요. " "별로 구경스러울 게 없는데?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어선인 걸. " "아줌만 그거 모르세요?

꽁치잡이 그물로 고래보다 더 큰 잠수함 생포했다는 거?"

"알지만. 꽁치망도 굉장히 길고 튼튼하니까 잠수함 낚은 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지. " "꽁치 그물로 잠수함을 낚았다는 게, 성경구절처럼 굉장히 암시적이고 노래가사 같이 시적 분위기가 있다는 생각 안 드세요?" "여기 사람들은 정작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빠서 그런 생각해 본 적 별로 없을 걸. " "정말 그렇다면 실망스러워요. " 조숙한 아이 같기도 하고 철부지 같기도 했다.

정민이 같은 또래는 자신들도 어쩔 수 없는 정신적 혼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긴 정민의 눈으로만 보면, 꽁치망에 잠수함은 시적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승희는 혼자 풀썩 웃기도 했다.

자기가 지금의 정민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추억 속으로 까마득하게 사라진 지난 날의 승희를 바라보며 승희는 정민이 앞에선 사양하고 싶었던 소주 한 잔을 후딱 비우고 말았다.

그러나 정민은 소주를 마시는 승희를 거부감을 가지고 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 잔을 더 따라 주었다.

결국은 승희 혼자서 회접시를 모두 비우고 해안도로로 나섰다.

옛날의 승희가 문득 그의 손을 잡았다.

난생 처음 찾아온 해안도시. 그리고 처음 만난 식당아줌마의 손을 스스럼없이 잡을 줄 아는 다정다감한 아이를 떼어놓고 떠나야 했던 철규의 쓰린 가슴을 이해할 듯하였다.

"정말, 꽁치잡이 어선 보여줄까?" "아니에요. 제 상상 속에서만 보는 게 좋겠어요. " "잘 생각했어. 나라도 그렇게 하겠네. " "아줌마 말 듣고 있으면, 제가 흡사 유치원생된 기분이에요.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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