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욱 대기자의 경제 패트롤] 토론과 다수결, 왜 그리 어렵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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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장마철이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가뜩이나 짜증나기 십상인 터에 세상 돌아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짜증 지대로’다. 한반도 아래쪽에선 비정규직법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될 고약한 일이 일어났고, 한반도 북녘에선 인민의 고혈로 미국 독립기념일 축하(?) 미사일 쇼를 벌이는 해괴한 일이 이어지고 있다. 남쪽에서 쌍용자동차가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고, 북쪽 개성공단에선 어이없는 협상이 공전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니 남쪽에 와 있는 외신기자들은 한국에 과연 민주주의와 다수결 원칙이란 게 있는 건지 되묻고, 북녘을 보는 외국 언론들은 부자 3대 세습과 핵실험·미사일 발사로 이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보며 의아하다 못해 아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왔는지 모르겠다. 비정규직법은 결코 그렇게 넘겨선 안 되는 법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기한규정의 철폐나 기한을 최소한 4년 수준으로 늘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법 개정이 시간상으로 어려웠으면 최소한 상당 기간 유예에는 합의했어야 했다. 거대 여당의 협상력 부재를 탓할 수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현실을 보지 않으려는-설마 보지 못하기야 했겠는가-민주당의 행태였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힘든 여건에서 제도 시행을 고집하는 건 선의는커녕 미필적 고의에 의한 해고 압력일 뿐이다. 쌍용차는 노사에 이어 노노 갈등에 외부 세력까지 가세하면서 노골적인 정치 투쟁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건 가당치도 않은 노정교섭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지난 1997년 외환위기의 도화선이 됐던 기아차 사태의 악몽이다. 그때 헛바람 넣다 크게 덴 경험이 남아 있어서인지 정치권의 동조가 덜한 것이-아직까지는-그나마 다행이다.

마냥 세월만 죽이는 개성공단 협상의 공전 책임은 누가 봐도-북만 빼고-북쪽에 있다. 무슨 전쟁 배상도 아니고 느닷없이 내지른 요구-임금을 4배로 올리고, 토지임대료 5억 달러를 새로 달라는-가 협상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건 통이 큰 게 아니고 무식한 것이다. 그런 요구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적어도 정상적인 국가들과는 ‘거래 끝’일 판이다. 미사일 쇼도 그렇다. 한번쯤 쏴보는 거야 군사훈련으로 이해하겠지만 연이어 그것도 보란 듯 미국 최대의 기념일에 맞춰 쏘는 건 치졸하다. 그게 처음엔 참신(?)한 협상술이었는지 몰라도, 상대방이 외려 ‘쟤들 쏠 때 됐지’ 할 때 쏘는 건 돈만 버리는 짓이다. 도대체 이런 일들이 한반도 남북에서 끊이질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 밖에선 보면 민족성이랄까 봐 겁날 지경이다. 북쪽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민주화 20년을 넘긴 남쪽에서조차 성숙한 시민사회의 바탕인 진지한 제의, 치열한 토론, 다수결 원칙이란 세 박자를 갖추기가 그리 어렵단 말인가.

박태욱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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