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에서]나설 사람…안나설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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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종찬 (李鍾贊) 안기부장이 언론을 타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잠수정 침투다, 무장간첩이다, 북한의 준동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에서 대북정보 책임자인 안기부장이 어떤 형태로든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정책의 투명성을 강조하고 각료들의 정책홍보를 부추기는 문민정부라 해서 국가안보 관련 정보를 관장하는 안기부장이 언론에 자주 인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안기부장이 직접 나서 북한 간첩 두명의 도주 가능성을 전하고 파키스탄 미사일 개발에 북한의 지원이 미미하다고 지적하는 발언들은 자칫 국가정책의 신뢰성을 해칠까 우려되기 때문이다.

미 중앙정보국 조지 테닛 국장은 의회 비공개회의와 예정된 대외 연설 이외엔 언론을 타지 않는다. 안기부장에 비하면 영부인의 활동을 다루는 데 우리 언론은 인색하다.

국민 대다수의 정서가 전면에 나서는 영부인을 별로 반기지 않는다는 지레짐작이 무게 있는 활동을 자제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변호사 출신인 미국의 영부인 힐러리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한다.

힐러리는 클린턴 정부 초기 의료개혁에 의욕을 보였다가 별 성과가 없어 비난의 표적이 된 적도 있고, 영부인의 활동을 보는 미 여론의 반응도 양분돼 있다.

하지만 힐러리는 21세기 준비의 일부로 미 역사 보존운동에 앞장서고 세계여성의 권리 진작에도 열성이다.

아프리카와 옛 소련 지역을 순방하며 미국의 가치를 알리는 데도 적극적이다.

적지않은 미국 여성들이 영부인을 '롤 모델 (본보기)' 로 삼고 있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는 힐러리의 열의와 전문성 때문이다.

우리 국민도 대통령의 민주화 투쟁에 동반자였고 역대 선임자들보다 수준높은 교육을 받은 영부인이 모두의 일에 나선다 해서 비아냥거리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본다. 뒤에 숨은 안기부장과 앞에 나선 영부인을 보고 싶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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