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언론 재갈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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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O J 심슨. 그는 미국의 풋볼선수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은퇴 후에는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미국인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자기의 전처를 살해한 살인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의 재판은 20세기 미국의 대표적인 재판 중 하나로 손꼽힌다. 1997년 2월 미국 샌타모니카 지방법원 배심원은 심슨에게 3350만달러(약 390억원)의 손해배상 평결을 내렸다. 이 중 실제 손해를 전보하는 금액은 850만달러에 불과하고, 나머지 2500만달러는 징벌적 손배배상금(punitive damages)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란 악의적이거나 의도적으로 불법행위를 한 경우 고액의 손해배상을 명령함으로써 그 사람을 응징해 다시는 그러한 불법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또 그와 유사한 상황에 있는 다른 사람도 그러한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아주 특별한' 제도를 말한다. 심슨처럼 자기의 전처와 그녀의 친구를 살해하고도 이를 부인하는 파렴치범에게 실제 발생한 손해만 배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으로는 어딘가 허전한 사람에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그 부족함을 채워준다.

열린우리당이 언론의 악의적 보도에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언론피해구제법의 제정을 추진하겠다는 것도 결국 언론사라는 파렴치범을 현행 제도로는 교화시킬 수 없다는 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아주 특별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징벌적 손해배상은 영미법계 국가에서 판례에 의해 발전해온 것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대륙법계 국가 중에 이를 실시하는 나라가 없다. 둘째, 미국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액은 배심원이 정하는데 우리나라는 배심제를 실시하고 있지 않다. 현재 사법개혁위원회에서 배심제의 채택 여부를 논의하고 있으나, 이러한 논의는 형사재판에 배심제를 도입할 것인지에 그친다. 셋째, 민사재판이 처벌의 성격을 갖는 것이 올바른지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 않다. 앞서 본 심슨 사건을 다시 보자. 그는 2년 전 열린 형사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형사재판에서 풀어주고, 민사재판에서 처벌적 성격을 가미해 고액의 손해배상을 명령하는 상황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미국에서도 논란이 많다. 넷째, 처벌적 성격의 손해배상인데 그 배상금을 국가가 아닌 피해자 개인이 모두 가져가는 것이 타당한지도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허위보도로 명예가 크게 훼손된 경우 그에 합당한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이 공평의 관념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국민의 감정에 힘입어 징벌적 손해배상의 도입론이 추진되고 있다. 사실 언론의 보도가 악의적일 경우 이를 시정할 수단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현재의 법제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위자료로 해결할 수 있다. 최근 제기되는 명예훼손소송을 보면 10억원대의 위자료를 요구하는 사건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03년 8월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과 4개 일간지를 상대로 낸 명예훼손소송의 액수는 총 30억원이었다. 실제로 억대의 위자료 지급을 명하는 판결도 종종 나온다.

이러한 상황에서 언론 보도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자는 것은 결국 100억원대 소송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이다. 웬만한 기업의 1년 매출액에 해당하는 금액을 배상해야 할 상황에 놓인 언론사가 소신껏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공직자 비리를 파헤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악의성을 기준으로 한다고 하더라도, 악의가 있는 것으로 보일까 두려워 말 못하는 언론사도 나오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천국인 미국에서조차 공인의 공적활동에 대한 비판은 징벌적 손해배상의 적용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다.

문재완 단국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