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변해도 너무 변했더군요.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릴만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어요. " 정주영 (鄭周永) 현대 명예회장의 둘째 동생으로 7박8일동안 함께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순영 (鄭順永.76) 성우그룹 명예회장은 귀환 직후인 23일 밤 이같이 고향방문의 소감을 밝혔다.
그는 여독 때문인듯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가 기자의 방문을 받고 일어나 방북기간 동안의 일을 2시간 넘게 차분히 술회했다.
정순영 회장의 방북기를 연재한다.
[편집자]
지난 45년 10월 지금은 돌아가신 아버님 (정봉식씨) 의 회갑잔치 때 단 이틀간 들른 이후 무려 53년 만에 찾는 고향이었다.
세월 탓도 있겠지만 너무 많이 변해 마을의 모습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형님 (정주영씨) 이 89년 방문했을 때는 집 마당에 있는 감나무를 보고 고향인 줄 알아봤다는데 그 감나무마저 웬일인지 한그루도 남아있지 않았다.
강원도통천군송전면아산리 고향마을에는 넓직한 대로를 한가운데 놓고 깔끔하게 단장된 기와집들이 줄맞춰 서있었다.
물이 하도 맑아 지나가던 서양 선교사가 '베리굿' 을 연발했다 해서 '베리굿 개울' 로 불리던 마을앞은 말끔히 단장돼 있었다.
우리 일행은 19일 원산에서 조그만 쾌속정을 타고 고저항 (庫低港)에 도착, 승용차로 4㎞를 달려 고향에 도착했다.
작은어머니와 50명 가량의 친척들, 그리고 큼지막한 환영 플래카드가 우리를 반겼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은 작은어머니와 나보다 두살 어린 마을 친구, 두사람 뿐이었다.
시력이 안좋은 작은어머니는 나를 보고 "네가 세영이냐, 상영이냐. 나한테 업혀다니며 울기도 많이 울던 네가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구나" 하며 연신 눈시울을 닦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촌이 워낙 많아 일일이 소개받고도 누가 누군지 기억하기 어려웠다.
마을 사람들이 고향집에 식수할 감나무를 미리 준비해 놓아 우리 형제들은 정성스레 나무를 심고 물을 줬다.
이어 고향 뒷산의 할아버지 묘소를 찾아 성묘했다.
50여년만에 조상을 모신다는 죄책감과 뭉클함이 밀려오면서 비로소 고향에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에서 내려오니 저녁잔치가 준비돼 있었다.
'이밥에 고깃국' 이 나왔고 맥주까지 곁들여지는 등 상당히 세심하게 배려한 것 같았다.
2시간여 얘기꽃을 피운 뒤 형님이 갑자기 "금강산에 가서 자자" 고 나섰다.
그 날은 고향집에서 자기로 돼있었는데 형님이 뭔가 착각한 듯했다.
작은어머니는 "주영아, 회포도 풀기 전에 네가 왜 그러느냐" 며 말렸으나 우리는 그냥 갈 수밖에 없었다.
금강산초대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우리 일행은 20일 아침 금강산 유람길을 떠나려는데 고향의 사촌 5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다.
"어렵게 만난 조카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며 다시 들르라는 작은어머니의 전갈을 갖고서. 작은어머니는 전날 우리가 떠난 후 한참을 울먹였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형님은 촉촉한 눈으로 "오늘 일정을 끝내고 고향집에 다시 가자" 고 했다.
우리는 구룡령과 비로봉.만물상 등을 구경했다.
그날 금강산은 종일 짙은 안개 속에 신비로운 자태를 좀체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안개 틈새로 가끔씩 비치는 금강산의 비경에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모두들 궂은 날씨를 원망하자 형님이 "금강산이 우리보고 다시 오라고 이번에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가 보다" 며 농담을 해 모두 한바탕 웃었다.
이른 저녁을 먹고 형님과 나, 두 동생 (세영.상영) , 조카 몽구 등 5명은 고향집에 갔다.
작은어머니는 우리를 보자 생기를 되찾고 옛날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잠자리에 들 때 형님은 건넌방에서 혼자 잤고 나와 동생들은 작은어머니와 한 방에 나란히 누웠다.
몽구는 방이 비좁아 환갑 나이에도 마루에서 자야 했다.
금강산은 제대로 못봤지만 18일 둘러본 묘향산은 정말 절경이었다.
평양을 떠난 우리는 이날 정오께 묘향산 초입에 있는 국제친선전람관부터 구경했다.
김일성 (金日成) 과 김정일 (金正日) 이 세계 각국에서 받은 29만7천여점의 선물을 전시하는 곳이었다.
나는 무심코 "이 많은 선물을 받았으면 그만큼 선물을 해줬겠네요" 하고 안내원에게 물었다가 분위기가 어색해지기도 했다.
묘향산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산중턱 개울에서 일행이 잠시 쉬는데 묘향산초대소 소속 여직원 20여명이 찾아와 점심을 대접했다.
정리 = 이재훈.김준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