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4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⑨

묵호댁이 병원으로 떠난 뒤, 그녀는 방으로 들어가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놀랍게도 창백했다.

분수 이상으로 예민해진 탓일까. 그녀는 화장그릇을 끌어당겨 크림으로 피부를 닦아내고 스킨을 발랐다.

그러나 밀크 로션을 바르다 말고 얼굴을 깨끗이 닦아내고 말았다.

감추려 하면 더욱 드러나 번지는 것은 얼굴 한가운데 선명하게 자리잡은 일그러진 슬픔이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가게를 나섰다.

우산을 받으며 언덕바지의 자취방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철규는 보이지 않았다.

변씨가 썰렁한 부엌에서 혼자 점심밥을 끓이고 있었다.

부엌에는 늙은 홀아비의 서투름과 비애가 가득하게 차 있었다.

승희는 변씨 손에 들려 있는 국자를 빼앗아 들었다.

그때 철규는 태호와 같이 방파제를 걷고 있었다.

태호의 혼란스런 내심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빗속이지만 산책을 핑계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철규는 처음으로 자신들의 모듬살이에 대한 불안을 느꼈다.

미세한 자극에도 결집력에 타격을 받을 수 있는 떨거지들이 이른바 한씨네 행중이었다.

노상에서 우연하게 마주친 사람들끼리 어쩌다 의기투합해서 시골장터를 들락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제 갈 곳으로 떠나버리면 구태여 만류할 명분도 없는 사람들이 알고보면 바로 한씨네 행중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봉환의 사건으로 저마다 뿔뿔이 흩어질 빌미까지 생긴 셈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떠날 수 있는 사람이 태호일 것 같았다.

그러나 철규는 행중에서 어느 누구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태호는 몇 번인가 다그쳐도 속내를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완고한 태도에서 태호의 결심을 엿볼 수 있었다.

"안돼. 그 소굴로 되돌아가려면 맘대로 해. 그러나 돌아가지 않으려면, 쫓겨다녀선 안돼. 봉환이가 당한 것보다 더 참혹한 보복을 당하더라도 오만하게 그리고 의연하게 대처해야 살아남을 수 있어. 의연하게 대처한다는 게 숨어버리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렵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간 태호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알아야 돼. 지금 당장은 두렵더라도 뱃심을 보이면 저들은 언젠가 지쳐서 태호를 포기할 수 있지만, 태호가 숨어버리거나 쫓겨다니기 시작하면, 보복은 더욱 잔인할 수도 있어. 그건 나보다 태호가 더 잘 알 테지. " 그런데도 태호는 대꾸가 없었다.

철규는 빗물에 젖고 있는 태호의 한 쪽 어깨를 힐끗 보았다.

작은 우산의 손잡이는 집을 나설 때부터 태호가 들고 있었다.

철규 쪽으로 치우쳐 받고 있는 우산으로 철규의 옷은 젖지 않았지만, 태호의 한 쪽 어깨는 빗물에 고스란히 젖고 있었다.

몇 번인가 우산을 태호 쪽으로 밀어주었지만, 몇 발짝 걷지 않아서 철규 쪽으로 바싹 기울어져 있곤 하였다.

태호의 그런 배려가 철규의 말을 지나쳐 듣지 않고 있다는 심증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혼자보다는 둘이 좋고 둘보다는 셋이 더 좋아. 괴팍스럽게 굴지 말고 내 말 들어. 우리나라와같이 좁은 땅에서 숨어다닌다 해서 얼마나 견딜 것 같아? 부처님 손바닥의 손오공이야. 이빨을 앙물고 뒤를 추적하겠다고 결심한 놈에겐 못당해. 언젠가는 찾아내고 말거야. 그러니까 또 다시 저놈들을 따돌리겠다는 어설픈 생각은 버려. 의형제 결의를 한 적은 없지만, 태호를 피붙이들 이상으로 아끼는 사람들이 넷이나 있잖아. 절대로 태호가 당하도록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깐,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거든 지금 이 시각부터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려. 그리고 나도 이 문제 때문에 두 번 다시 태호를 닦달하는 일은 없을 테니깐 아로새겨 들어둬. 우리들로부터 떠나주는 것이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은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이야.즐거움보다는 고통을 같이 겪고 나눌 수 있어야만 태호를 비롯해서 우리 모두가 멋지게 살아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