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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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가게로 돌아왔으나 가슴속이 텅 빈 것 같은 공허감은 여전했다.

술청에는 해장국을 먹으러 온 손님들도 없었고, 묵호댁은 조리실에 우두커니 앉아 담배만 죽이고 있었다.

빗소리만 요란한 문 밖이나 습기가 축축한 가게 안이나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식탁의자에 주저앉았다.

가슴속으로부터 선명하게 느껴지는 빈자리가 있었다.

그것은 봉환이가 눈앞에 없음으로써 만들어진 공백감이 분명했다.

처음으로 느끼는 막연한 연민의 감정이었다.

남들이 소리죽여 수군거리는 내연의 처. 그것이 봉환이와 공유하고 있었던 공간이었다. 그 공유의 공간이 가졌던 나름대로의 의미가 조금씩 흩어져 지금은 흔적조차 희미한 줄 알았다.

그런데 사고를 당하고 난 뒤 봉환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은 놀랍게도 승희 한 사람뿐이란 것에 그녀 자신도 놀랐다.

그녀에게 병상을 남기고 이젠 안심했다는 듯 모두들 자취방으로 떠났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침울한 혼란이 그때부터 승희를 뒤흔들고 있었다.

어느덧 그녀는 어설프나마 봉환이란 남자의 아내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 대수롭지 않은 족쇄로부터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찰나, 그녀는 아직도 족쇄의 중앙에 명경하게 자리잡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와 동거하기로 했던 섣부른 약속에도 돌이킬 수 없는 멍에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를 혼란으로 빠뜨리고 있는 공허감의 단서가 거기에 있었다.

바닷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 모래알로 표현되고 있는 덧없는 인생살이가 이토록 큰 무게감을 갖고 있다니. 선웃음 같은 발성의 욕구가 목구멍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러나 선웃음은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때 등뒤에서 그녀의 상념을 깨뜨리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술 한 잔 할래요?" "그래야겠죠. " 자연스럽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승희는 곧장 고개를 흔들었다.

술을 마신다 해서 난삽한 공허감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감정 노출의 절제가 필요한 시간에 오히려 폭력적인 자기 혐오감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묵호댁은 소주병 마개를 따고 혼자서 훌쩍 소주 한 잔을 들이켰다.

산전수전 겪으며 살다보면 중도 만나고 소도 만나듯이 애꿎은 일을 당해도 가게는 꾸려나가야겠지요. 두 잔째의 소주잔을 들이켜며 묵호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승희는 자배기를 챙겨들고 가게를 나섰다.

영동식당에는 활어를 정기적으로 공급해주는 단골상인을 두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어판장에서 승희 손수 활어들을 조달해 왔다.

그러나 어판장도 방파제 가녘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뿐 인적이라곤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새벽에 어장으로 조업 나간 어선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녀는 휑뎅그렁한 어판장 한가운데 서서 혼자 열적게 웃었다.

날씨가 흐렸던 일요일 날, 낮잠을 자다가 소스라쳐 일어나 열심히 책가방을 챙겼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묵호댁은 왜 그랬을까. 부둣가의 풍속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꿰고 있을 묵호댁은 자배기를 들고 어판장으로 나오는 승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어째서 출항한 어선들이 없었다는 것을 일깨워주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승희처럼 혼란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녀도 승희처럼 어딘가 골똘하게 빠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승희는 골목어귀에 있는 수채구멍에서 콸콸 쏟아지는 물줄기를 오랫동안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게로 돌아왔다.

자취방으로 돌아갔던 한철규 일행이 몰려와 문득 술청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있어주기를 기다렸던 것도 허사였다.

묵호댁은 여전히 담배만 죽이고 있었다.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말이 승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묵호댁. 병원에 가보실래요?" 그때였다.

묵호댁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담배불을 비벼 껐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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