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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의 ‘스마트 리더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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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XX들, 뭐가 잘났다고 여기 나타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지난달 23일 저녁.

봉하마을로 달려온 정세균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에 이런 욕설이 쏟아졌다. 검찰의 노 전 대통령 수사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며 민주당을 비난해온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외쳐댄 소리였다. 하지만 정 대표가 시신 앞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자 험악하던 분위기는 곧 누그러졌다. 정 대표는 장례기간 내내 분향소에 출근하며 상주 역할을 했고, 민주당은 ‘노 전 대통령을 계승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됐다. 지지율도 근 5년 만에 처음으로 한나라당을 추월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이 해체될 당시에도 정 대표(당시 당 의장)는 쓴소리를 들었다. “참여정부에서 장관했다고 친노세력 등에 업고 동료들의 발목을 잡느냐”는 극언을 듣기도 했다. 지지율이 바닥이던 노 대통령 측 세력과 결별해야 대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던 탈당파들 앞에서 “특정 세력(친노)을 배제하지 않는 대통합만이 살 길”이라며 열린우리당을 지키는 대열에 섰기 때문이었다. 정 대표를 포함한 통합파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대선을 앞두고 탄생한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열린우리당의 골격이 유지될 수 있었다.

지난해 7월 통합민주당의 첫 대표직을 맡은정 대표는 곧바로 노 전 대통령을 찾아가 인사했다. 반노(反盧)세력의 핵심이었던 구 민주당계 의원들을 대동해 노 전 대통령과의 화해를 주선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 대표같이 내가 앞으로도 만날 사람들이 지도부가 돼 다행스럽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정 대표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서로 껄끄러웠던 민주당과 친노세력의 화합을 무리 없이 끌어낸 건 이런 그동안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노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 내내 차분한 태도를 지켰다. “서거에 책임질 사람, 세력이 있다”는 한마디 외엔 “추모에 집중할 때”라며 입을 닫았다. “‘참을 인(忍)’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데 나는 ‘참을 인’자 10개를 가슴에 품고 산다”는 정 대표의 이 같은 처신을 최재성 전 민주당 대변인은 ‘스마트 리더십’이라고 표현했다. ‘오버’하지 않는 합리적 자세로 상대방과의 대화에 노력하되 원칙을 지켜야 할 땐 강하게 나가는 리더십이란 것이다.

그러나 정 대표의 리더십이 정말 스마트한지 평가를 받으려면 이제부터다. 민주당의 지지율 상승은 스스로 잘해서가 아니라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로 인한 ‘반사이익’이란 건 민주당 의원들조차 동의하는 사실이다.

정 대표가 지난 11개월 동안 지휘봉을 잡아온 민주당은 여당이 내놓는 정책마다 반대를 거듭하고, 외부 상황 변화에 따라 행동을 결정해온 ‘반응 정치’의 연속이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정 대표가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목소리를 높이는 외부 강경세력에 편승해 장외정치만 계속한다면 대안·수권정당으로의 도약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민생법안이 산적한 6월 국회가 20일 넘게 표류 중이다. 정 대표의 ‘스마트 리더십’이 국회에서 발휘되기를 기대한다.

강찬호 정치부문 차장